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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6 :: 王力 - 협음설에 대한 비판(对叶音说的批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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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王力(1900~1986)의 『詩經韻讀(1980)』 중 『詩』韻總論 부분의 첫 번째 챕터인 '협음설에 대한 비판(对叶音说的批判)을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시경(詩經)』은 운이 있는 것이다. 『주송(周頌)』 중 몇 편 운이 없는 시(無韻詩)를 제외하고는 모두 운이 있는 시(有韻詩)이다. 단지 우리가 지금 읽으면, 운이 있는 것 같지 않은 부분이 많은데, 이것은 어음이 장기간의 역사적 변천을 거쳤기 때문에, 금음(今音)과 고음(古音)이 같지 않은 것이며, 우리가 현대의 독음으로 이천 년 전의 고시를 읽으면, 자연히 많은 부분이 운이 맞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시경운두(詩經韻讀)』의 목적은 바로 『시경』의 입운자(入韻字)를 모두 고음으로 주음(注音)하여, 독자가 『시경』의 운이 잘 맞는다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고음을 가지고 『시경』을 읽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불필요하기도 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만약 고음을 따라 읽으려고 한다면, 책의 글자를 모두 고음으로 읽어야지 운각(韻脚)만 고음으로 읽고, 기타 많은 글자는 그대로 금음으로 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책의 글자를 모두 고음으로 읽는다면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불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시경』을 읽는 것은 주로 그 시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지 그 시의 용운(用韻)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금음으로 읽을 수 있지만, 마음으로 그 뜻을 알고, 운이 없다고 잘못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금음으로 고시를 읽으면 운이 전혀 맞지 않지만,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송대(宋代)와 『시경』 시대의 거리가 거의 이천 년이지만, 그때 전혀 맞지 않았던 정황은 이미 매우 중요하다. 『시경』을 읽는 사람들이 고음과 금음이 같지 않았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이에 ‘협음설(叶音說, 즉 協音說)’을 만들어냈다. ‘협음(叶音)’은 『시경』을 쓴 사람의 어음이 후대 사람들과 똑같았다 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경』 중 많은 부분의 압운이 잘 맞지만, 다만 소수의 부분에서 잘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응당 어떤 글자를 임시로 어떤 음으로 고쳐 읽어서 잘 맞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이론의 착오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1
협음설의 대표는 주희(朱熹, 1130~1200)이다. 그는 그의 저작 『시집전(詩集傳)』과 『초사집주(楚辭集注)』에서 모두 협음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家’ 자가 있다. 『시경‧주남(周南)‧도요(桃夭)』의 ‘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에서 ‘家’와 ‘華’가 운인데, 금음을 가지고 읽어도 또한 잘 어울리므로, 협음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시경‧소아(小雅)‧상체(常棣)』의 ‘宜爾室家, 樂爾妻帑. 是究是圖, 亶其然乎!’에서 주희는 ‘家’ 자 밑에 ‘叶古胡反’이라고 주를 달았다. ‘家’ 자에 ‘古胡反’이라고 주를 단 것은 『빈풍(豳風)‧치효(鴟鴞)』의 ‘家’(据, 荼, 租, 瘏와 압운) 2, 『소아‧채미(采薇)』의 ‘家’(故, 居와 압운) 3, 『소아‧아행기야(我行其野)』의 ‘家’(樗, 居와 압운) 4, 『소아‧우무정(雨無正)』의 ‘家’(都와 압운) 5, 『대아(大雅)‧면(緜)』의 ‘家’(徒와 압운) 6 등이 있다. 7
명말 진제(陳第, 1541~1617)는 협음설을 반대한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때에는 옛날과 지금이 있고, 땅에는 남과 북이 있다. 글자가 바뀌고 음이 바뀌는 것은, 또한 형세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바이다(時有古今, 地有南北. 字有更革, 音有轉移, 亦勢所必至.).’라고 말하였다. 그의 역사적 관점은 정확했다. 이 관점에 의하면, 그는 ‘家’의 고음이 본래 ‘姑’이고, 임시로 바꾸어 읽은 것이 전혀 아니며, 이른바 협음이라는 것이 없다고 여겼다. ‘家’를 ‘姑’로 읽으면 ‘華’와 압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華’의 고음이 ‘敷’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母’는 반드시 ‘米’로 읽어야 하고, ‘馬’는 반드시 ‘姥’로 읽어야 하며, ‘京’은 반드시 ‘疆’으로 읽어야 하고, ‘福’은 반드시 ‘偪’으로 읽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했는데, 모두 본음이지 협음이 아니다. 뒤에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진제의 이론에 근거하여 『시본음(詩本音)』을 썼다. 진제와 고염무가 정한 고음은 비록 아직 충분히 과학적이지 못했지만, 그들은 협음을 배척하고, 글자마다 오직 하나의 고음이 있으니 고쳐 읽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히 정확하다. 8
주희는 그의 유심론(唯心論)적인 협음설에서 출발하여, 많은 착오를 냈다. 첫째로, 몇몇 글자는 원래 운각이 아니었는데, 억지로 운각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소남(召南)‧행로(行露)』 2장의 ‘誰謂雀無角, 何以穿我屋. 誰謂女無家, 何以速我獄. 雖速我獄, 室家不足.’과 3장의 ‘誰謂鼠無牙, 何以穿我墉. 誰謂女無家, 何以速我訟. 雖速我訟, 亦不女從.’에서 주희는 2장의 ‘家’ 자에 ‘叶音谷’이라고 주음하였고, 3장의 ‘家’ 자에는 ‘叶各空反’이라고 주음하였다. 실제로 이 두 개의 ‘家’ 자는 모두 운각이 아니지만, 주희는 제멋대로 억측하였다. 둘째로, 몇몇 운이 있는 곳에 운이 있다고 알지 못했다. 예를 들면, 『패풍(邶風)‧북문(北門)』의 ‘出自北門, 憂心殷殷. 終窶且貧, 莫知我艱. 已焉哉, 天實爲之, 謂之何哉.’에서 ‘爲’ 자와 ‘何’ 자가 압운이 되는데, 구말(句末)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주희는 소홀히 하여 놓쳐 버렸다. 셋째로, 많은 곳에서 주희가 주음한 협음은 사실 상고에는 주음한 글자와 음이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운부(韻部)도 같지 않다. 예를 들면, 『주남(周南)‧관저(關雎)』의 ‘參差荇菜, 左右采之. 窈窕淑女, 琴瑟友之.’에서 주희는 ‘采’ 자에 ‘叶此禮反’이라고 주음하였는데, ‘采’ 자와 ‘友’ 자는 상고에 운부가 같았지만, ‘禮’ 자와 ‘友’ 자는 상고에 운부가 같지 않았으므로, ‘此禮反’이 도리어 잘못되었다. 넷째로, 가장 가소로운 것은 애매모호한 협음이다. 예를 들면, 『정풍(鄭風)‧여왈계명(女曰雞鳴)』의 ‘弋言加之, 與子宜之.’에서 주희는 ‘加’ 자에 ‘叶居之, 居何二反’이라고 주음하였고, ‘宜’ 자에 ‘叶魚奇, 魚何二反’이라고 주음하였는데, 만약 ‘加’ 자를 ‘居之反’으로 읽으면, ‘宜’ 자를 ‘魚奇反’으로 읽고, ‘加’ 자를 ‘居何反’으로 읽으면, ‘宜’ 자를 ‘魚何反’으로 읽으라는 뜻이다. 결국 운자가 수의적으로 다르게 읽힐 수 있게 된다. 『시경』의 작자가 참으로 이렇게 썼단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요컨대 협음설은 유심론의 허구이며, 반드시 비판받아야 한다. 9
청대에는 많은 고음 연구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옛 운을 연구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은 고음을 알지 못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협음설을 채용한다. 따라서, 다시 비판을 제기하여 유심론의 영향을 일소할 필요가 있다. 10
- 원주 : ‘叶’은 xie2로 읽으며 協과 통한다. [본문으로]
- 원주 : 이 음은 곧 姑이다. [본문으로]
- 『詩經‧豳風‧鴟鴞』 ‘予手拮据, 予所捋荼, 予所蓄租, 予口卒瘏, 曰予未有室家.’ [본문으로]
- 『詩經‧小雅‧采薇』 ‘靡室靡家, 玁狁之故. 不遑啟居, 玁狁之故.’ [본문으로]
- 『詩經‧小雅‧我行其野』 ‘我行其野, 蔽芾其樗. 昏姻之故, 言就爾居. 爾不我畜, 復我邦家.’ [본문으로]
- 『詩經‧小雅‧雨無正』 ‘謂爾遷于王都, 曰予未有室家.’ [본문으로]
- 『詩經‧大雅‧緜』 ‘乃召司空, 乃召司徒, 俾立室家.’ [본문으로]
- 진제(陳第)의 『모시고음고(毛詩古音考)』 서문 중에서 [본문으로]
- 원주 : 이 음은 곧 公이다. [본문으로]
- 원주 : 예를 들면, 『초사(楚辭)‧이소(離騷)』의 ‘汩余若將不及兮, 恐年歲之不吾與. 朝搴阰之木蘭兮, 夕攬洲之宿莽.’에 대해 『선진문학사참고자료(先秦文學史參考資料)』에서는 ‘莽은 고음이 母이며, 여기에서는 “米”처럼 읽고, 윗 문장의 “與” 자와 협운이다(莽, 古音母, 此處讀如“米”, 與上文“與”字叶韻.).’라고 하였는데, 이 주에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로, ‘莽’은 고음에서 절대로 ‘母’로 읽지 않으며, ‘莽’과 ‘母’는 상고에 운부가 같지 않았다. 둘째로, ‘米’처럼 읽어도 절대로 윗 문장의 ‘與’ 자와 협운이 될 수 없는데, ‘米’와 ‘與’ 또한 상고에 운부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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