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列傳》曰:孟軻,
《사기열전》에 이르기를, '맹자는
趙氏曰:孟子,魯公族孟孫之後。《漢書注》云,字子車,一說,字子輿。
조씨가 말했다. "맹자는 노(魯)나라 공족 맹손의 후예이다." 《한서》의 주석에 이르기를 자는 子車라 하고, 일설에 자는 子輿라고 한다.
騶人也,
騶(추)나라 사람이니
騶,亦作鄒,本邾國也。
'騶'는 '鄒'라고도 쓰니 본래 주(邾)나라이다.
受業子思之門人。
자사의 문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子思,孔子之孫,名伋。《索隱》에 云,王劭以人爲衍字,而《趙氏注》及《孔叢子》等書,亦皆云,孟子親受業於子思,未知是否。
자사는 공자의 손자이니 이름은 伋이다. 《사기색은》에 이르기를, 왕초(王劭)는 '人'이 연문이라고 했고, 조씨의 주석과 《공총자》 등의 책에 또한 모두 이르기를 맹자가 친히 자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으니 옳은지 알 수 없다.
慶源輔氏曰:子思之門人無顯名於後者,而孟子真得子思之傳,則疑親受業於子思者為是,而《集註》兩存其說,蓋自古聖賢固有聞而知之者,不必待耳傳靣命而後得也。又以《中庸》一書觀之,所以傳授心法,開示藴奥如此其至,則當時門弟子豈無見而知之者?孟子從而受之,愈益光明,亦宜有之也。”
〇西山真氏曰:“七篇之書,其出乎《中庸》者非一。其曰四端云者,則未發之中,中節之和也。蓋仁義禮知,性也,所謂大本也。惻隱、羞惡、辭讓、是非,情也,所謂逹道也。其曰禹、稷、顔回同道,孔子仕止久速者,則君子而時中也。其曰鄉原亂德者,則小人而無忌憚也。其曰子莫執中者,時中之反也。其曰曽子、北宮黝之勇者,南北方之強也。其曰仁之實事親,義之實從兄,禮之實節文斯二者,則仁者人也,親親為大,義者宜也,尊賢為大,親親之殺,尊賢之等,禮所生也。其曰堯舜性之,湯武反之,則自誠明之謂性,自明誠之謂教也。其曰天下國家之本在身,則為天下國家有九經也。至於誠者天之道,思誠者人之道一章之義,悉本於《中庸》,尤足以見淵源之所自。
道旣通,
도에 이미 통달하였을 때에
趙氏曰:孟子通五經,尤長於《詩》、《書》。
조씨가 말했다. "맹자는 오경에 통달하고 특히 《시경》과 《서경》에 뛰어났다."
程子曰:孟子曰,可以仕則仕,可以止則止,可以久則久,可以速則速,孔子,聖之時者也,故知《易》者,莫如孟子。 又曰:王者之迹,熄而《詩》亡,《詩》亡然後,《春秋》作。又曰:《春秋》無義戰。又曰:《春秋》,天子之事,故知《春秋》者,莫如孟子。
정자가 말했다. "맹자가 말했다. '출사할 만하면 출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 두고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있고, 속히 떠날 만하면 속히 떠난 사람은 공자이니 성인의 때에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경》을 안 사람은 맹자만한 사람이 없다. <맹자가> 또 말했다. '왕 된 사람의 발자취가 없어지니 《시경》 또한 없어졌다. 《시경》이 없어진 후에 《춘추》가 지어졌다' <맹자가> 또 말했다. '《춘추》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다.' <맹자가> 또 말했다.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춘추》의 일을 안 사람은 맹자만한 사람이 없다."
尹氏曰:以此而言,則趙氏謂孟子長於《詩》、《書》而已,豈知孟子者哉?
윤씨가 말했다. "이것으로써 말한다면 조씨는 맹자가 《시경》과 《서경》에 뛰어났다고 말했을 뿐이다. 어찌 맹자를 안 사람이겠는가."
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제(齊) 선왕(宣王)에게 유세하였으니 선왕(宣王)이 등용하지 못하였고 양(梁)나라로 가자 양(梁) 혜왕(惠王)도 말한 바를 실행하지 못했으니 우원하여 현실 사정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다.
按史記,梁惠王之三十五年乙酉,孟子始至梁,其後二十三年當齊湣王之十年丁未,齊人 伐燕,而孟子在齊,故古史謂孟子先事齊宣王,後乃見梁惠王、襄王、齊湣王。獨孟子以伐燕爲宣王時事,與《史記》、《荀子》等書皆不合,而《通鑑》以伐燕之歲,爲宣王十九年,則是孟子先游梁而後至齊見宣王矣。然《考異》亦無他據,又未知孰是也。
《사기》를 살펴보면, 양(梁) 혜왕(惠王) 35년 을유에 맹자가 양(梁)나라에 처음 이르렀고, 그 후 23년인 제(齊) 민왕(湣王) 10년 정미에 제(齊)나라가 연(燕)나라를 정벌했는데, 맹자가 제(齊)나라에 있었다. 그러므로 옛날 역사에는 맹자가 먼저 제(齊) 선왕(宣王)을 섬기고 후에 양(梁) 혜왕(惠王), 양왕(襄王), 제(齊) 민왕(湣王)을 만났다. 유독 《맹자》에만 연(燕)나라를 정벌한 것이 선왕(宣王) 때의 일이라고 한 것은 《사기》, 《순자》 등의 책과 모두 부합하지 않고, 《자치통감》에 연(燕)나라를 정벌한 때가 선왕(宣王) 19년이라고 하니 곧 이는 맹자가 먼저 양(梁)나라에 유세한 후에 제(齊)나라에 이르러 선왕(宣王)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고이》에도 또한 다른 근거가 없으니 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新安陳氏曰:謹按《通鑑綱目》,周顯王三十三年乙酉,孟軻至魏。慎靚王二年壬寅,魏君罃卒,孟軻去魏適齊。五年乙巳,燕君噲以國讓其相子之。赧王元年丁未,齊伐燕,取之。分注但云齊王,其下即書孟軻去齊。赧王二年戊申,即齊閔王地。元年,閔即湣字。伐燕一事,《史記》以為齊湣王十年丁未,蓋以顯王四十六年戊戌為齊閔王元年。《通鑑》以為宣王十九年丁未,蓋以顯王三十七年己丑為宣王元年。《史記》、《通鑑》之不同蓋如此。證以《通鑑綱目》,丁未,宣王卒,閔王立,戊申方改元,則丁未乃宣王末年,閔王繼位之年,蓋未能的知伐燕之為先君事與嗣君事也。以淖齒事證之,閔王為是。孟子謂為宣王,恐傳冩之訛耳。無所折衷,姑以《綱目》為據云。
當是之時,秦用商鞅,楚、魏用吳起,齊用孫子、田忌,天下方務於合從(縱)連衡(橫),
이 때를 당하여 진(秦)나라는 상앙(商鞅)을 등용하고, 초(楚)나라와 위(魏)나라는 오기(吳起)를 등용하고, 제(齊)나라는 손자(孫子)와 전기(田忌)를 등용하여 천하가 막 합종책과 연횡책에 힘써서
〇新安陳氏曰:“蘇秦主合從之說,欲合六國為一以抗秦。張儀主連衡之說,則離六國之交以事秦。六國,謂楚、燕、齊、韓、趙、魏也。”
以攻伐爲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
공격과 정벌을 훌륭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맹가는 이에 당(唐)나라와 우(虞)나라 삼대의 덕을 기술했는데, 이 때문에 가는 곳마다 <뜻이> 합하지 아니하여 물러나 만장(萬章)의 문도들과 함께 《시경》, 《서경》을 서술하고 중니의 뜻을 서술하여 《맹자》 일곱 편을 지었다.
趙氏曰:凡二百六十一章,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조씨가 말했다. "모두 261장에 34,685자이다."
韓子曰:孟軻之書,非軻自著,軻旣沒,其徒萬章、公孫丑相與記軻所言焉耳。
한자가 말했다. "맹가의 책은 맹가가 스스로 저술한 것이 아니고 맹자가 이미 죽은 후에 그 문도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가 함께 맹가가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일 뿐이다."
愚按:二說不同,《史記》近是。
내가 생각하건대 두 설이 같지 않은데, 《사기》가 옳을 것이다.
韓子名愈,字退之,諡文公,唐鄧州人。
〇問:序說謂《史記》近是,而《集註》於滕文公篇首章云門人不能盡記其辭,又第四章云記者之誤如何?朱子曰:前說是,後兩處失之。熟讀七篇,觀其筆勢,如鎔鑄而成,非綴緝可就也。《論語》便是記録綴緝所為,非一筆文字矣。
〇新安陳氏曰:愚聞或疑《易·繫辭》有子曰字,以為非孔子作。朱子曰:安知非後人所加,如周子自著《通書》,五峯刋之,每章加周子曰字。今讀《孟子》亦當㑹此意。
韓子曰:堯以是傳之舜,舜以是傳之禹,禹以是傳之湯,湯以是傳之文、武、周公,文、武、周公傳之孔子,孔子傳之孟軻,軻之死,不得其傳焉。荀與揚也,擇焉而不精,語焉而不詳。
한자(한유)가 말했다. "요(堯)는 순(舜)에게 이것을 전하고, 순(舜)은 우(禹)에게 이것을 전하고, 우(禹)는 이것을 탕(湯)에게 전하고 탕(湯)은 이것을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에게 전하고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은 공자에게 전하고 공자는 맹가에게 전했다. 맹가가 죽음에 그 전한 것을 얻을 수 없으니, 순자(荀子)와 양자(揚子)는 그것에 대해 선택했지만 정밀하지 못하였고, 그것에 대해 말했지만 상세하지 못했다."
焉 : 於之
程子曰:韓子此語,非是蹈襲前人,又非鑿空撰得出,必有所見。若無所見,不知言所傳者何事。
정자가 말했다. "한자의 이 말은 옛 사람의 말을 답습한 것이 아니고, 또한 빈 말을 뚫어서 지어 낸 것이 아니니, 반드시 본 것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본 것이 없었다면 전한 바라고 말한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다."
荀子,名况,戰國時趙人。揚子,名雄,漢蜀郡人。
〇朱子曰:此非深知所傳者何事,則未易言也。堯舜之所以為堯舜,以其盡此心之體而已。禹、湯、文、武、周公、孔子傳之以至於孟子,其間相望有或數百年者,非得口傳耳授宻相付屬也,特此心之體隱乎百姓日用之間,賢者識其大,不賢者識其小,而體其全且盡者,則為得其傳耳。
〇又曰:孟氏,醇乎醇者也。荀與揚大醇而小疵。
또 말했다. "맹씨는 순수하고 순수한 사람이며, 순자(荀子)와 양자(揚子)는 크게 순수하기는 하지만 작은 허물이 있다."
程子曰:韓子論孟子甚善,非見得孟子意,亦道不到。其論荀、揚則非也。荀子極偏駁,只一句性惡,大本已失。揚子雖少過,然亦不識性,更說甚道?
정자가 말했다. "한자가 맹자를 논한 것은 매우 좋다. 맹자의 뜻을 얻지 못했다면 또한 말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순자와 양자를 논한 것은 잘못되었다. 순자는 지극히 치우쳐서 잡스러우니 단지 본성이 악하다는 한 구절에 큰 뜻을 이미 잃어버렸다. 양자는 비록 허물이 적으나 또한 본성을 알지 못했으니 다시 무슨 도를 말하겠는가."
甚 : 무엇 삼
《荀子·性惡篇》:人之性惡,其善者偽也。今人之性,生而有好利焉,有疾惡去聲焉,有耳目之欲好聲色焉。然則從人之性,順人之情,必出於争奪,合於犯分亂理而歸於暴。故必將有師法之化,禮義之道,音導,然後出於辭譲,合於文理,而歸於治。然則人之性惡明矣,其善者偽也。
〇《揚子·脩身篇》:人之性也善惡混,脩其善則為善人,脩其惡則為惡人。氣也者,所適善惡之馬也歟。
〇朱子曰:韓子謂荀、揚大醇小疵,非是。由田駢、慎到、申不害、韓非之徒觀之,則荀、揚為大醇耳。
〇程子說荀、揚等語,是就分金秤上說下來。
〇又曰:孔子之道大而能博,門弟子不能徧觀而盡識也,故學焉而皆得其性之所近。其後離㪚分處諸侯之國,又各以其所能授弟子,源逺而末益分。惟孟軻師子思,而子思之學出於曽子。自孔子没,獨孟軻氏之傳得其宗,故求觀聖人之道者,必自《孟子》始。
또 말했다. "공자의 도는 크고 능히 넓으니, 문하의 제자들이 두루 보고 다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서 배울 때에 모두 그 성질에 가까운 것을 얻었다. 그 후에 흩어져 나뉘어 제후의 나라에 거처하면서 또한 각각 그 능한 바로써 제자에게 전수해 주니, 근원이 멀어지고 끝이 더욱 나뉘었다. 오직 맹가는 자사를 사사하였는데, 자사의 학문은 증자에게서 나왔다. 공자가 죽은 후로부터 유독 맹가씨의 전함이 그 정통성을 얻었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를 관찰하기를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맹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程子曰:“孔子言參也魯,然顔子没後,終得聖人之道者,曽子也。觀其啓手足時之言,可以見矣。所傳者子思、孟子,皆其學也。”
정자가 말했다. "공자는 參이 노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자가 죽은 후에 끝내 성인의 도를 얻은 사람은 증자이다. 그 수족을 연 때의 말을 보면 볼 수 있을 것이니 전한 것은 자사와 맹자가 모두 그 학문이었다."
問:大是就渾淪處說,博是就該貫處說否?
朱子曰:韓子亦未必有此意,但如此看亦自好。
問學焉而皆得其性之所近。曰:政事者就政事上學得,文學者就文學上學得,德行言語者就德行言語上學得。
〇慶源輔氏曰:韓子但言孔門諸子惟曽子之學獨傳,而有子思、孟軻,然不言其所以獨傳之故,故程子又從而發明之,以為曽子只縁資質魯鈍,故用功於内者深篤確實。觀其啓手足之言,所謂一息尚存,此志不容少懈者,此聖道之所以終傳而有子思、孟子之學也。
〇又曰:揚子雲曰:古者楊墨塞路,孟子辭而闢之,廓如也。夫楊墨行,正道廢,孟子雖賢聖,不得位,空言無施,雖切何補?然賴其言,而今之學者尚知宗孔氏,崇仁義,貴王賤霸而已。其大經大法皆亡滅而不救,壞爛而不收,所謂存十一於千百,安在其能廓如也?然向無孟氏,則皆服左祍而言侏離矣。
또 말했다. "양자운이 말했다. '옛날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길을 막았는데 맹자가 말하고 물리쳐서 넓혀 놓았다.' 무릇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행해지면 정도가 폐해지니 맹자가 비록 현성이었지만 지위를 얻지 못해서 빈 말로 시행할 수 없었을 것이니 비록 간절한들 무슨 보탬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말을 힘입어서 지금 배우는 사람들이 아직도 공씨를 높이고 인의를 숭상하며 왕도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를 천하게 여겨야 함을 알고 있지만 그 큰 원리와 큰 법칙은 모두 망실되어 구하지 못하고 파괴되어 거두지 못하여 이른바 천과 백에서 십과 일이 남았다고 하니 그 능히 넓혔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지난번에 맹씨가 없었더라면 모두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옷과 오랑캐의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張存中曰:《後漢·南蠻傳》云:衣裳班闌,語言侏離。侏離,蠻夷語言不分朗之聲也。
左衽 :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복식
侏離 : 통하지 않는 오랑캐의 말
故愈嘗推尊孟氏,以為功不在禹下者,為此也。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맹씨를 추존하여 공로가 우(禹)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고 여긴 것은 이 때문이다.
新安陳氏曰:自夫楊墨行,至安在其能廓如也,皆是難辭。揚中之抑,只着向無孟氏二句幹轉,而斷之以孟氏功不在禹下,盡之矣。孟子闢楊、墨功不在禹治洪水下者,洪水溺人之身,異端䧟溺人心,心溺之禍甚於身溺故也。
或問於程子曰:孟子還可謂聖人否?程子曰:未敢便道他是聖人,然學已到至處。
혹자가 정자에게 물었다. "맹자도 또한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자가 말했다. "곧 그 사람이 성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배움이 이미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愚按:至字,恐當作聖字。
내가 생각하건대 '至' 자는 아마도 마땅히 '聖' 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朱子曰:若以孟子比孔子時說得髙,然孟子道性善,言必稱堯舜,又見孟子說得實。
〇慶源輔氏曰:未敢便道他是聖人,以其行處言,學已到聖處,以其知處言也。孟子論大而化之之謂聖,聖而不可知之之謂神,與夫聖智巧力之譬,精宻切當,非想像臆度之所能及,是其學已到聖處也。然其英氣未化,有露圭角處,故未敢便道他是聖人,此其權度審矣。
〇程子又曰:孟子有功於聖門,不可勝言。仲尼只說一箇仁字,孟子開口便說仁義。仲尼只說一箇志,孟子便說許多飬氣出來。只此二字,其功甚多。
정자가 또 말했다. "맹자가 성인의 도에 공로가 있는 것을 모두 다 말할 수 없다. 중니는 단지 仁 한 가지만 말했지만 맹자는 입을 열면 곧 仁과 義를 말했으며, 중니는 단지 志 한 가지만을 말했지만 맹자는 곧 허다하게 養氣를 말했으니 단지 이 두 글자의 공이 심히 많다."
〇又曰:“《孟子》有大功於世,以其言性善也。”
또 말했다. "맹자가 세상에 공로가 큰 것은 본성이 선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〇又曰:《孟子》性善養氣之論,皆前聖所未發。
또 말했다. "맹자의 性善과 養氣의 이론은 모두 이전의 성인들이 개발하지 못한 것이다."
慶源輔氏曰:言性善,使資質美者聞之,必求復其本然而充其善。資質不美者聞之,亦知所自警而不流於惡。言養氣,使氣質剛柔不齊者勇猛奮發於道義,而無㢲懦怯弱之弊。皆發夫子所未發,其功多蓋在此,此所以有大功於世也。
〇又曰:學者全要識時,若不識時,不足以言學。顔子陋巷自樂,以有孔子在焉。若孟子之時,世既無人,安可不以道自任?
또 말했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온전하게 때를 알아야 하니, 만약 때를 알지 못하면 학문을 말하기에 부족하다.
〇又曰:《孟子》有些英氣,才有英氣,便有圭角,英氣甚害事。
또 말했다. "맹자는 영기가 조금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영기가 있으면 곧 규각이 있으니 영기는 일에 아주 해롭다.
新安陳氏曰:英氣甚害事,蓋責賢者備之辭。
如顔子便渾厚不同。顔子去聖人只毫髪間。孟子大賢,亞聖之次也。
그러나 안자는 곧 혼후하여 같지 이와 않으니 안자는 성인과의 거리가 다만 터럭 하나 차이이고, 맹자는 큰 현인이나 아성의 다음이다."
圭角 : 圭의 모서리처럼 말이나 행동이 모가 나서 남들과 잘 융합하지 못하는 것.
渾厚 : 화기 있고 인정이 두터운 것.
或曰:英氣見於甚處?曰:但以孔子之言比之便可見。且如氷與水精非不光,比之玉,自是有温潤含蓄氣象,無許多光耀也。
혹자가 말했다. "영기는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습니까?" 대답했다. "다만 공자의 말로써 비교하면 곧 알 수 있다. 또한 마치 얼음과 수정이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옥에 비교하면 자연히 이것은 따뜻하고 윤택하고 머금고 쌓인 기상이 있고 허다한 광휘가 없는 것과 같다."
覺軒蔡氏曰:聞之程子又曰,仲尼,元氣也。顔子,春生也。孟子,并秋殺盡見。仲尼,無所不包。顔子示不違如愚之學於後世,有自然之和氣,不言而化者也。孟子則露其材,蓋亦時然而已。仲尼,天地也。顔子,和風慶雲。孟子,泰山巖巖之氣象也。觀其言皆可見之矣。仲尼無迹,顔子㣲有迹,孟子其迹著。孔子儘是明快人,顔子儘豈弟,孟子儘雄辨。
〇慶源輔氏曰:英氣是剛明秀發之氣,此自是好底氣質,若消化未盡,猶有圭角,則有時而發。學要變化氣質,須渾然純是義理,如張子所謂‘徳勝於氣,性命於徳,方始是成就處。
又曰:言,心聲也,德之符也。有德者必有言,若就言上看得分明,則其德無餘藴矣。玉有温潤含蓄氣象,所以為寳。人有温潤含蓄氣象,所以為聖也。其理一也。
楊氏曰:《孟子》一書,只是要正人心,敎人存心養性,收其放心。至論仁、義、禮、智,則以惻隠、羞惡、辭讓、是非之心為之端。論邪說之害,則曰生於其心,害於其政。論事君,則曰:格君心之非,一正君而國定。千變萬化,只說從心上來。人能正心,則事無足為者矣。《大學》之脩身、齊家、治國、平天下,其本只是正心、誠意而已。心得其正,然後知性之善。故孟子遇人便道性善。
양씨가 말했다. "《맹자》 한 책은 단지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그 방심을 거두는 것이다. 인의예지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써 단서를 삼고, 사악한 설의 해를 논함에 있어서는 곧 말하기를 '마음속에서 생겨서 그 정사에 해를 끼친다'고 하였고, 임금을 섬김을 논함에 있어서는 곧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의 잘못됨을 바로잡아야 한다. 한 번 군주를 바로잡으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많은 변화를 단지 심상으로부터 말했다. 사람이 능히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으면 일은 가히 할 것이 없다. 《대학》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그 근본이 단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에 성실히 하는 것 뿐이니 마음이 그 바름을 얻은 후에야 본성이 선함을 안다. 그러므로 맹자가 사람을 만날 때에는 곧 본성이 선하다고 말했다.
朱子曰:心得其正,然後知性之善,語若有病。蓋知性之善,然後能正其心,心得其正,然後有以真知性之為善而不疑耳。
〇慶源輔氏曰:人能正心,則事無足為者,其語亦失之大快。觀《大學》正心之後,於脩身齊家治國平天下更有工夫在。
歐陽永叔,
그런데 구양영숙(歐陽永叔)은
名脩,廬陵人。
却言,聖人之教人,性非所先,可謂誤矣。人性上不可添一物,堯舜所以為萬世法,亦是率性而已。所謂率性,循天理是也。外邊用計用數,假饒立得功業,只是人欲之私,與聖賢作處,天地懸隔。
도리어 말하기를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본성은 먼저 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잘못되었다고 할 만하다. 사람의 본성 위에는 하나도 더할 수가 없으니 요순이 만세의 법이 된 이유도 역시 본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른바 본성을 따른다는 것은 천리를 따르는 것이니 이것이다. 이외에 계책을 쓰고 술수를 쓰면 가령 공업을 세우고 얻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인욕의 사사로움이니 성현이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현격한 차이가 있다."
假饒 : 假使
慶源輔氏曰:此數句,判斷二帝三王及漢唐以後為治之道所以不同,明白詳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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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世家曰 孔子는 名丘요 字仲尼니 其先은 宋人이라 父는 叔梁紇이요 母는 顏氏니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十一月庚子에 生孔子於魯昌平鄉陬邑하니 爲兒嬉戲에 常陳俎豆하고 設禮容이러시니 及長爲委吏하사는 料量平하고
《사기 세가》에 이르기를, 공자의 이름은 丘이고 자는 仲尼이니 그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숙량흘이고 어머니는 안씨이니 노(魯)나라 양공 22년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노(魯)나라 창평향 추(鄹)읍에서 공자를 낳았다. 어려서 놀 때에는 항상 조두를 진열하고 예의 바른 용모를 갖추었다. 자라서는 위리가 되어 급료의 분량을 공평하게 하였다.
紇 : 묶을 흘 陬 : 땅 이름 추 嬉 : 놀 희 俎 : 도마 조 豆 : 제기 두
委吏 : 곡식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
委吏는 本作季氏史로되 索隱云一本에 作委吏라하여 與孟子合하니 今從之하노라
위리는 원래 계씨사로 되어 있었는데 《사기색은》에 이르기를, 어떤 책에는 위리라고 되어 있다고 하여 《맹자》와 부합하니 지금은 이것을 따른다.
爲司職吏하사는 畜蕃息하시니라
사직리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息 : 번식할 식
職은 見周禮牛人이라 讀爲樴이니 義與杙同하니 蓋繫養犧牲之所라 此官은 卽孟子所謂乘田이라
'職'은 《주례》 〈우인〉을 보면 '樴'으로 읽으니 의미가 '杙'과 같다. 아마도 희생을 매어 놓고 기르는 장소일 것이다. 이 관직은 곧 《맹자》에서 '승전'이라고 말한 것이다.
樴 : 말뚝 직 杙 : 말뚝 익
適周하사 問禮於老子하시고 旣反而弟子益進이러라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묻고 돌아오니 제자들이 더욱 나아왔다.
昭公二十五年甲申은 孔子年三十五라 而昭公奔齊魯亂하니 於是에 適齊하여 爲高昭子家臣하사 以通乎景公하시다
소공 25년 갑신은 공자의 나이 35세이니, 소공이 제(齊)나라로 도망가서 노(魯)나라가 혼란하였다. 이에 제(齊)나라로 가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경공과 통하였다.
有聞韶問政二事라
소악을 듣고, 정사를 물은 두 가지 일이 있다.
公欲封以尼谿之田한대 晏嬰이 不可라하니 公惑之어늘
공이 이곡의 밭으로 봉하고자 하였으나 안영이 불가하다고 하니 공이 미혹되었다.
有季孟吾老之語라
'季孟'과 '吾老'의 말이 있다.
孔子遂行하사 反乎魯하시니라 定公元年壬辰은 孔子年四十三이라 而季氏強僭하고 其臣陽虎作亂專政이라 故로 孔子不仕하시고 而退修詩書禮樂하시니 弟子彌衆이러라
공자가 드디어 떠나 노(魯)나라로 돌아왔다. 정공 원년 임진은 공자의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해서 참람하고, 그 가신 양호가 난을 일으켜 정사를 전횡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시경》, 《서경》, 《예기》, 《악경》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九年庚子는 孔子年五十一이라 公山不狃以費畔季氏하고 召孔子어늘 欲往而卒不行하시니라
9년 경자는 공자의 나이 51세이다. 공산불뉴가 비읍(費邑)을 가지고서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불렀는데, 가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가지 않았다.
畔 : 배반할 반
有答子路東周語라
자로에게 동주로 답한 말이 있다.
定公이 以孔子爲中都宰하니 一年에 四方則之라 遂爲司空하시고 又爲大司寇하시다 十年辛丑에 相定公하사 會齊侯于夾谷하시니 齊人歸魯侵地하다 十二年癸卯에 使仲由爲季氏宰하여 墮三都하고 收其甲兵이러니 孟氏不肯墮成이어늘 圍之不克하다
정공이 공자를 중도재로 삼으니 1년만에 사방이 다스려졌다. 드디어 사공으로 삼고 또 대사구로 삼았다. 10년 신축에 정공을 도와 제후(齊侯)와 협곡에서 회맹하니 제(齊)나라가 노(魯)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었다. 12년 계묘에 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재(家宰)가 되게 하여 세 도읍을 허물고 그 갑옷과 병기를 거두려 했다. 맹씨가 기꺼이 성(成) 땅을 허물지 않았으므로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墮 : 허물 휴
十四年乙巳는 孔子年五十六이라 攝行相事하사 誅少正卯하시고 與聞國政하시니 三月에 魯國大治라 齊人이 歸女樂以沮之하니 季桓子受之하고 郊又不致膰俎於大夫한대 孔子行하시니라
14년 을사는 공자의 나이 56세였다. 재상의 일을 대신 행하여 소정묘를 주살하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니, 3개월만에 노(魯)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齊)나라가 여자 악공을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가 그것을 받고 또 교제에 제사지낸 제육(祭肉)이 대부들에게 이르지 않자 공자가 떠났다.
膰 : 제육(祭肉) 번
魯世家에 以此以上이 皆爲十二年事라
《노세가》에 이 이상이 모두 12년의 일이라고 되어 있다.
適衛하사 主於子路妻兄顏濁鄒家하시다
위(衛)나라로 가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의 집에 우거하였다.
孟子에 作顏讎由라
《맹자》에는 안수유로 되어 있다.
適陳하실새 過匡하시니 匡人以爲陽虎而拘之하다
진(陳)나라로 가서 광(匡) 땅을 지나니 광 땅 사람이 양호라고 여겨 구류하였다.
有顏淵後及文王旣沒之語라
안연이 뒤에 이르렀고, 문왕이 이미 죽었다는 말이 있다.
旣解에 還衛하사 主蘧伯玉家하사 見南子하시다
풀려나서 위(衛)나라에 돌아가 거백옥의 집에 우거하면서 남자(南子)를 만나보았다.
有矢子路及未見好德之語라
자로가 실망하였고, 덕을 좋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去適宋하신대 司馬桓魋欲殺之어늘
떠나서 송(宋)나라에 갔는데 사마 환퇴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魋 : 상투 퇴
有天生德語及微服過宋事라
하늘이 덕을 낳았다는 말과 미복으로 송나라를 지나간 일이 있다.
又去適陳하사 主司城貞子家하시고 居三歲而反于衛하시니 靈公이 不能用하다
또 떠나서 진(陳)나라에 가서 사성 정자의 집에 우거하여 3년 동안 거한 다음에 위(衛)나라로 돌아오니 영공이 능히 쓰지 못했다.
有三年有成之語라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다는 말이 있다.
晉趙氏家臣佛肸이 以中牟畔하여 召孔子어늘 孔子欲往이라가 亦不果하시다
진(晉)나라 조씨의 가신 필힐이 중모 땅을 가지고서 배반하여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는 가고자 하였으나 역시 실행하지 않았다.
佛 : 클 필 肸 : 클 힐 牟 : 보리 모 畔 : 배반할 반
有答子路堅白語及荷蕢過門事라
자로에게 堅白으로 답한 말과 삼태기를 멘 사람이 문을 지나간 일이 있다.
蕢 : 삼태기 궤
將西見趙簡子라가 至河而反하사 又主蘧伯玉家러시니 靈公이 問陳이어늘 不對而行하사 復如陳하시다
장차 서쪽으로 가서 조간자를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황하에 이르자 돌아가 또 거백옥의 집에 우거했다. 영공이 진법(陳法)을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고 떠나서 다시 진(陳)나라로 갔다.
據論語하면 則絕糧當在此時라
《논어》에 근거하면 식량이 떨어진 일이 마땅히 이 때에 있었을 것이다.
季桓子卒에 遺言謂康子호되 必召孔子라하더니 其臣止之한대 康子乃召冉求하다
계환자가 죽을 때에 계강자에게 유언으로 말하기를, '반드시 공자를 불러라'라고 하였는데 그 가신들이 저지하므로 계강자가 이에 염구를 불렀다.
史記에 以論語歸與之歎으로 爲在此時라하고 又以孟子所記歎辭로 爲主司城貞子時語라하니 疑不然이라 蓋語孟所記 本皆此一時語어늘 而所記有異同耳라
《사기》에는 《논어》의 돌아가야겠다는 탄식이 이 때에 있었다고 하고, 또 《맹자》에 기록된 바 탄식하는 말은 사성 정자의 집에 우거하였을 때의 말이라고 하니 아닐 것 같다. 아마도 《논어》와 《맹자》에 기록된 것은 본래 모두 이 한 때의 말인데 기록된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孔子如蔡及葉하시니라
공자가 채(蔡)나라로 가서 섭(葉) 땅에 이르렀다.
有葉公問答子路不對와 沮溺耦耕과 荷蓧丈人等事라
섭공과 문답한 일, 자로가 대답하지 않은 일,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함께 밭을 간 일, 지팡이에 삼태기를 꿰어 맨 사람의 일 등이 있다.
耦 : 나란히 갈 우(偶) 蓧 : 삼태기 조
史記云 於是에 楚昭王이 使人聘孔子하여 孔子將往拜禮어늘 而陳蔡大夫發徒圍之라 故로 孔子絕糧於陳蔡之間이라 有慍見及告子貢一貫之語라
《사기》에 이르기를, 이에 초(楚) 소왕이 사람을 시켜 공자를 부르게 하여 공자가 장차 배례하러 왔는데,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대부들이 무리를 징발하여 그를 포위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식량이 떨어졌다. 노여워하며 본 일과 자공에게 한 가지로 궤뚫는다고 이른 말이 있다.
按是時陳蔡臣服於楚하니 若楚王來聘孔子면 陳蔡大夫安敢圍之리오 且據論語컨대 絕糧이 當在去衛如陳之時라
내가 살펴보건대 이 때에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는 초(楚)나라에 신하로 복종하였는데, 만약 초왕이 와서 공자를 초빙하였다면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대부들이 어찌 감히 그를 포위하였겠는가. 또 《논어》에 근거하면, 식량이 떨어진 일이 마땅히 위(衛)나라를 떠나서 진(陳)나라로 가던 때에 있었을 것이다.
楚昭王이 將以書社地로 封孔子러니 令尹子西不可라하니 乃止하니라
초 소왕이 장차 서사 땅으로 공자를 봉하려고 하니 영윤 자서가 불가하다고 하여 중지하였다.
史記云 書社地七百里라하니 恐無此理라 時則有接輿之歌라
《사기》에 이르기를 서사 땅은 칠백 리라고 하니 이러한 이치가 없을 것 같다. 이때에 접여가 노래한 일이 있었다.
又反乎衛하시니 時에 靈公已卒하고 衛君輒이 欲得孔子爲政하며
또 위(衛)나라에 돌아왔는데 당시에 영공은 이미 죽었고, 위나라 군주 첩이 공자를 얻어 정사를 하고자 하였다.
有魯衛兄弟及答子貢夷齊, 子路正名之語라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는 형제라는 말, 자공에게 백이와 숙제로 답한 말, 자로에게 정명으로 답한 말이 있다.
而冉求爲季氏將하여 與齊戰有功한대 康子乃召孔子어늘 而孔子歸魯하시니 實哀公之十一年丁巳而孔子年六十八矣라
염구가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齊)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계강자가 이에 공자를 불러서 공자가 노(魯)나라로 돌아오니 실로 애공 11년 정사이고 공자의 나이 68세였다.
有對哀公及康子語라
애공과 계강자에게 대답한 말이 있다.
然이나 魯終不能用孔子하고 孔子亦不求仕하사 乃敘書傳禮記하시며
그러나 노(魯)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고 공자 또한 벼슬하기를 구하지 않아, 《서전》과 《예기》를 서술하였다.
有杞宋, 損益, 從周等語라
杞宋, 損益, 從周 등의 말이 있다.
刪詩正樂하시며
《시경》을 산삭하고 《악경》을 바로잡았다.
有語大師及樂正之語라
태사에게 말한 말과 음악이 바르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序易彖繫象說卦文言하시니라
《주역》 〈단전〉, 〈계사전〉, 〈상전〉, 〈설괘전〉, 〈문언전〉을 지었다.
序 : 서술할 서
有假我數年之語라
나에게 수 년을 빌려달라는 말이 있다.
弟子蓋三千焉에 身通六藝者七十二人이러라
제자들이 거의 삼천 명이었는데 몸소 육예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
弟子顏回最賢이나 蚤死하고 後惟曾參得傳孔子之道라
제자 중 안회가 가장 현명했으나 일찍 죽었고, 후에 오직 증삼이 공자의 도를 전할 수 있었다.
蚤 : 일찍 조
十四年庚申에 魯西狩獲麟하니
14년 경신에 노(魯)나라에서 서쪽으로 사냥을 갔다가 기린을 잡았다.
有莫我知之歎이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탄식이 있었다.
孔子作春秋하시니라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
有知我罪我等語라 論語에 請討陳恒事도 亦在是年이라
'知我罪我' 등의 말이 있었다. 《논어》에 진항을 토벌하자고 청한 일도 역시 이 해에 있었다.
明年辛酉에 子路死於衛하고 十六年壬戌四月己丑에 孔子卒하시니 年七十三이라 葬魯城北泗上하다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로되 惟子貢은 廬於冢上하여 凡六年이러라 孔子生鯉하시니 字伯魚라 先卒하고 伯魚生伋하니 字子思니 作中庸하시니라
다음해 신유에 자로가 위(衛)나라에서 죽고 16년 임술 4월 기축에 공자가 죽으니 나이가 73세였다. 노(魯)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안장하였다. 제자들은 모두 심상(心喪) 3년을 지내고 떠났지만 오직 자공만은 무덤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서 모두 6년을 지넀다. 공자는 공리를 낳았으니 자는 백어인데, 먼저 죽었다. 백어는 공급을 낳으니 자가 자사이며, 《중용》을 지었다.
心喪 : 상복은 입지 않되 마음으로 근신하는 일
子思學於曾子하고 而孟子受業子思之門人하니라
자사는 증자에게서 배웠고, 맹자는 자사의 문인에게서 업을 받았다.
何氏曰 魯論語는 二十篇이요 齊論語는 別有問王知道하여 凡二十二篇이요 其二十篇中章句도 頗多於魯論이라 古論은 出孔氏壁中하니 分堯曰下章子張問하여 以爲一篇하여 有兩子張하니 凡二十一篇이요 篇次不與齊魯論同하니라
하씨가 말했다. "《노논어》는 20편이고, 《제논어》는 별도로 〈문왕〉과 〈지도〉가 있어 모두 22편이고, 그 20편 안의 장구도 《노논어》와 파다하게 다르다. 《고논어》는 공씨의 벽 안에서 나왔는데, 〈요왈〉 아래 장에 〈자장문〉을 나누어 한 편을 만들어 두 개의 〈자장〉이 있으니 모두 21편이고, 편의 차례도 《제논어》나 《노논어》와 같지 않다."
程子曰 論語之書는 成於有子曾子之門人이라 故로 其書獨二子以子稱하니라
정자가 말했다. "《논어》 책은 유자와 증자의 문인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책에서는 유독 두 사람을 자라고 칭했다."
程子曰 讀論語에 有讀了全然無事者하며 有讀了後에 其中得一兩句喜者하며 有讀了後에 知好之者하며 有讀了後에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니라
정자가 말했다. "《논어》를 읽음에 다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이 있고, 다 읽은 후에 그 마음 속에 한두 구절을 얻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으며, 다 읽은 후에 깨달아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다 읽은 후에 곧 부지중에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는 사람도 있다."
程子曰 今人은 不會讀書로다 如讀論語에 未讀時도 是此等人이요 讀了後에도 又只是此等人이면 便是不曾讀이니라
정자가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독서할 줄을 알지 못한다. 만약 《논어》을 읽을 때에 읽지 않았을 때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고, 읽은 후에도 또 단지 이와 같은 사람이면 곧 이것은 읽지 않은 것이다."
會 : 알 회
程子曰 頤自十七八로 讀論語하니 當時已曉文義러니 讀之愈久에 但覺意味深長이로라
정자가 말했다. "나(程頤)는 17, 18세부터 《논어》를 읽었는데 당시에도 이미 글 뜻에 밝았는데 읽기를 더욱 오래 하니 다만 의미가 깊고 길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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