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시경 2022. 10. 30. 01:46

이 글은 흠정사고전서총목제요에 실린 『詩傳大全』의 제요와 약간 다르다.

臣等謹按:『詩集傳大』全二十巻,明胡廣等撰,亦永樂中所修『五經大全』之一也。自宋以後,言皆宗朱子集傳,其薈集衆説以相闡發者,毋慮數十種,往往得失互見,學者旁參博考,亦不能専主一家。至明成祖始命儒臣輯為『大全』,以集其成。其與纂修者,自胡廣以下,如楊榮、金幼孜等凡四十二人,悉一時知名之士。然其書實本元安成劉瑾所著『詩傳通釋』而稍損益之。今劉氏之本尚存,取以參校,大約取其冗蔓者略刪數條。又劉本以詩「小序」隸各篇之下,是書別為一編,小變其例,而大指則全相蹈襲與『四書大全』之本倪士毅輯釋、『春秋大全』之本汪克寛纂疏者約略相似,故後人多所譏議。明代為『葩經』之學者,亦不盡據是書然當時頒布學宮,凡士子之習舉子業者,必以此為準則乃一代定制所在,亦有未可竟廢者。故並著之於録,以備參考焉。

신 등이 삼가 살핍니다. 『시전대전』 전 20권은 명나라 호광 등이 찬수한 것으로 또한 영락 때에 찬수된 『오경대전』의 하나입니다. 송나라 이후로, 『시경』을 설명한 것이 모두 주자의 『집전』을 으뜸으로 삼았고, 여러 설을 모아서 서로 밝힌 것이 무려 수십 종인데, 왕왕 득실이 모두 있어 배우는 사람이 광범위하게 살펴도 또한 일가의 학설만 위주로 할 수 없었습니다. 명나라 성조 때에 이르러 처음 儒臣들에게 명을 내려서 『대전』을 편집하게 하여 집성하였습니다. 함꼐 찬수한 사람은 호광 이하로 양영, 금유자 등 모두 42인인데, 모두 한 시대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책은 사실 안성 유근이 지은 바 『시전통석』을 기본으로 약간 덜어내거나 더한 것입니다. 지금 유근의 책이 아직 남아 있어 참조하고 교정하여, 대략 너무 난잡한 것에 있어서는 몇 조목을 대략 삭제하였습니다. 또 유근의 책은 「소서(小序)」를 각 편에 나누어 예속시켰지만, 이 책은 따로 한 편을 만들고 그 체제를 약간 바꾸었지만, 대지는 온전히 답습하였으니, 『사서대전』이 본래 예사의의 집석을 바탕으로 하고, 『춘추대전』이 왕극관의 찬소를 바탕으로 한 것과 대략 서로 같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많이 비웃었습니다. 명나라 때 『시경』의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또한 모두 이 책을 근거로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학궁에 반포되어, 무릇 士子로 과거의 업을 익히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으로 준칙을 삼았으니, 곧 한 시대의 확립된 제도가 있는 것이므로 또한 끝내 폐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록에 아울러 저술 두어 참고함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乾隆四十二年三月恭校上

건륭 42년(1777) 3월 삼가 교정해 올립니다.


總纂官 臣 紀臣 陸錫熊 臣 孫士毅

총찬관 신 기윤 신 육석웅 신 손사의
總校官 臣 陸費墀

총교관 신 육비지

 

posted by 취상
:
한문학/시경 2022. 10. 30. 01:33

詩經大全二十卷 通行本

『시경대전』20권 통행본


明胡廣等奉勅撰. 亦永樂中所修『五經大全』之一也. 自北宋以前, 說『詩』者, 無異學. 歐陽修·蘇轍以後, 別解漸生. 鄭樵·周孚以後, 爭端大起. 紹興·紹熙之間, 左右佩劍, 相笑不休. 迄宋末年, 乃古義黜而新學立. 故有元一代之說『詩』者, 無非朱『傳』之箋疏, 至延祐行科擧法, 遂定爲功令, 而明制因之.

명나라 호광 등이 칙령을 받들어 지었다. 또한 영락 연간에 찬수된 『오경대전』 중의 하나이다. 북송 이전에는, 『시경』을 설명한 것이 다른 학문이 없었다. 구양수와 소철 이후에, 다른 해석이 점차 생겨났다. 정초와 주부이후에는, 쟁론의 단서가 크게 일어났다. 소흥, 소희 연간에는, 좌우에 칼을 차고서 서로 비웃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송나라 말엽에 옛 해석이 물러나고 새로운 학문이 세워졌다. 그러므로 원나라 때에 『시』를 설명한 것은 주희의 『집전』의 전과 소가 아닌 것이 없었는데, 연우 연간에 이르러 과거법이 시행되어 마침내 공령(功令)으로 정해지니, 명나라의 제도는 인습했다.

廣等是書, 亦主於羽翼朱『傳』, 遵憲典也. 然元人篤守師傳, 有所闡明, 皆由心得. 明則靖難以後, 蓍儒宿學, 略已喪亡. 廣等無可與謀, 乃剽竊舊文以應詔. 此書名爲官撰, 實本元安成劉瑾所著『詩傳通釋』而稍損益之.

호광 등의 이 책은, 또한 주로 주희의 『집전』을 받들어 헌전을 따랐다. 그러나 원나라 사람들이 스승의 전수를 독실하게 지켜서 드러내어 밝힌 바가 있었는데, 모두 마음대로 터득한 것이다. 명나라 정난의 변 이후에는 점치는 선비나 뛰어난 학자가 대략 이미 죽어 없어졌다. 호광 등은 더불어 도모할 수가 없어서 옛날 문장을 표절해서 조서에 응했다. 이 책은 이름은 관찬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론 원나라 안성 유근이 지은 바 『시전통석』을 바탕으로 약간 덜어내거나 더한 것이다.

羽翼 : 날개처럼 도와 받드는 일.

今劉氏之書, 尙有傳本, 取以參校, 大約於其太冗蔓者, 略刪數條, 而餘文如故. 惟改其中‘瑾案’二字爲‘劉氏曰’, 又劉書以「小序」分隷各篇, 是書則從朱子舊本合爲一篇, 小變其例而已. 顧炎武『日知錄』, 朱彛尊『經義考』竝抉摘其非, 陳啓源『毛詩稽古篇』, 但責廣等採劉瑾之說太濫, 猶未究其源也.

지금 유근의 책은 전본이 아직 있어서 가져다가 참고하고 교정하여, 대략 너무 난잡한 것에 있어서는 몇 조목을 대략 삭제했고, 나머지 문장은 옛날과 같이 두었다. 오직 그 중의 ‘근안(瑾案)’이라는 두 글자를 고쳐 ‘유씨왈(劉氏曰)’로 하였고, 또 유근의 책은  「소서(小序)」를 각 편에 나누어 예속시켰지만 이 책은 주자의 옛 판본을 따라 한 편으로 합치고 그 체제를 조금 바꾸었을 뿐이다. 고염무의 『일지록』과 주이존의 『경의고』도 그 잘못을 아울러 지적하였고, 진계원의 『모시계고편』은 단지 호광 등이 유근의 학설을 채택한 것이 너무 방대함을 비난하였지만, 여전히 그 근원은 궁구하지 않았다.

其書本不足存, 惟是恭逢聖代, 考定藝文, 旣括千古之全書, 則當備歷朝之沿革, 而後是非得失, 釐然具明. 此書爲前明取士之制, 故仍錄而存之, 猶小學類中存『洪武正韻』之例云爾.

이 책은 본래 보존하기에는 부족하나 오직 성스러운 시대를 삼가 맞이하여 예문을 고증하고 교정함에 이미 천고의 전서를 포괄하였으니, 마땅히 역대 왕조의 연혁을 갖춘 다음에야 시비와 득실이 조리 있게 다 밝혀지리라. 이 책은 전의 명나라에서 선비를 취하는 제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저록하여 남겨 두었으니, 소학류 중에 『홍무정운』을 남겨 둔 경우와 같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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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취상
:
한문학/시경 2022. 10. 23. 18:39

※이 글의 저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시전대전(詩傳大全)』(청구기호 K1-40),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시전대전(詩傳大全)』(청구기호 한古朝04-10), 학민문화사에서 출판한 『시전 부언해(詩傳 附諺解)』, 문연각 사고전서본 『시전대전(詩傳大全)』이다. 편차는 장서각 소장본을 따랐다.

詩傳大全凡例

 

一, 是經一以朱子『集傳』爲主通釋, 所采諸家之說與朱傳相矛盾者去之, 庶無惑於學者, 其朱子『語類』·『文集』曁諸家之論有所發明者, 今皆增入.

하나, 이 경은 한결같이 주자의 『집전』을 위주로 하여 통석하였는데, 채록한 바 제가의 설과 주자의 『집전』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버렸으니, 배우는 사람들에게 의혹이 없기를 바란다. 주자의 『어류』, 『문집』 및 제가의 의론이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 있으면, 지금 모두 더하여 넣었다. 

 

一, 諸儒之說, 不拘世次先後, 一以解經爲序, 其有郡號者, 則加以別之, 有不可考者, 直書某氏而已. 

하나, 제유의 설은 세차와 선후에 구속되지 않고, 한결같이 경전을 해석하는 것으로 순서를 삼았다. 군호(郡號)가 있는 사람은 더하여 구별하였고, 상고할 수 없는 사람은 다만 모씨(某氏)라고 썼다.

 

一, 小序, 朱子已辨其得失, 通釋以隸各篇之下. 今仍爲一編, 附于卷末, 以還其舊.

하나, 소서는 주자가 이미 그 득실을 분별하여 통석하고 각 편의 아래에 예속시켰는데, 지금은 인하여 한 편을 만들어서 권말에 붙여서 구본으로 돌아간다.

 

一,  名物等圖, 一依廬陵羅氏所集, 諸國世次, 及作詩時世圖, 一依安成劉氏, 存之以備觀覽.

하나, 물명 등의 그림은 한결같이 여릉 나씨가 모은 것에 의거하였고, 여러 나라의 세차와 시를 지은 때에 대한 그림은 한결같이 안성 유씨에 의거하였는데, 보존해 두어 볼 때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廬陵羅氏는 羅復이고, 安成劉氏는 원나라의 학자 劉瑾으로, 『詩傳通釋』을 남겼다.

 

一, 『集傳』中所載郡邑, 間有沿革不同, 今謹依『皇朝郡邑志』, 增註于下.

하나, 『시전』 중에 실린 군읍은, 사이에 연혁이 같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지금 삼가 『황조군읍지』에 의거하여 아래에 주를 더했다.

 

一, 引用先儒姓氏

하나, 인용한 선유들의 성씨이다.

성씨-이름-자-호(내지 출신지) 순으로 나열하였다.

  • 毛氏 萇
  • 鄭氏 玄 康成 
  • 陸氏 璣 
  • 杜氏 預 元凱
  • 孔氏 穎達 仲達
  • 廬陵歐陽氏 脩 永叔
  • 程子 伯淳 明道
  • 程子 正叔 伊川
  • 張子 子厚 橫渠
  • 眉山蘇氏 轍 子由
  • 臨川王氏 安石 介甫
  • 南豊曾氏 子固 
  • 華陽范氏 祖禹 淳夫 
  • 藍田呂氏 大鈞 和叔
  • 藍田呂氏 大臨 與叔 
  • 上蔡謝氏 良佐 顯道 
  • 龜山楊氏 時 中立 
  • 元城劉氏 安世 器之 
  • 永嘉陳氏 鵬飛 少南 
  • 山陰陸氏 佃 農師 
  • 三山李氏 樗 迂仲 
  • 黃氏 櫄 實夫 
  • 永嘉鄭氏 
  • 長樂王氏 
  • 建安胡氏 安國 康侯 
  • 長樂劉氏 彛 執中 
  • 渤海胡氏 旦 
  • 莆田鄭氏 樵 漁仲 夾漈
  • 致堂胡氏 寅 明仲 
  • 南軒張氏 栻 敬夫 廣漢
  • 東萊呂氏 祖謙 伯恭 金華
  • 董氏 
  • 丘氏 
  • 徐氏 
  • 三山林氏 之奇 少穎 
  • 止齋陳氏 傅良 君舉 永嘉
  • 廬陵李氏 如圭 寶之 
  • 胡氏 泳 伯量 南康 
  • 北溪陳氏 淳 安卿 臨漳
  • 慶源輔氏 廣 漢卿 潛庵
  • 覺軒蔡氏 模 仲覺 建安
  • 格庵趙氏 順孫 括蒼 
  • 天台潘氏 時擧 子善 
  • 雙峰饒氏 魯 伯輿 廣信
  • 龍舒王氏 日休
  • 潛室陳氏 埴 器之 永嘉
  • 西山眞氏 德秀 景元 建安
  • 曹氏
  • 顔氏 達龍 江陵
  • 容齋項氏 安世 平甫 江陵
  • 錢氏
  • 華谷嚴氏 粲 坦叔
  • 濮氏 一之 斗南
  • 新安王氏 炎 晦叔
  • 段氏
  • 劉氏
  • 東齋陳氏 大猷
  • 建安熊氏 剛大
  • 疊山謝氏 枋得 君直 廣信
  • 勿軒熊氏 禾 去非 建安
  • 須溪劉氏 會孟 辰翁
  • 建安何氏 士信
  • 竹房張氏 學龍
  • 廬陵彭氏 執中
  • 新安胡氏 一桂 庭芳 雙湖
  • 鄱陽董氏 鼎
  • 定宇陳氏 櫟 壽翁 新安
  • 東陽許氏 謙 益之 白雲
  • 安成劉氏 瑾 公瑾
  • 廬陵羅氏 中行
  • 廬陵曹氏 居貞
  • 豊城朱氏 善 備萬

一, 今奉 勅纂脩

1. 翰林院學士 兼 左春坊大學士 奉政大夫 臣 胡廣

2. 奉政大夫 右春坊右庶子 兼 翰林院侍講 臣 楊榮

3. 奉直大夫 右春坊右諭德 兼 翰林院侍講 臣 金幼孜

4. 翰林院脩撰 承務郞 臣 蕭時中

5. 翰林院脩撰 承務郞 臣 陳循

6. 翰林院編脩 文林郞 臣 周述

7. 翰林院編脩 文林郞 臣 陳全

8. 翰林院編脩 文林郞 臣 林誌

9. 翰林院編脩 承事郞 臣 李貞

10. 翰林院編脩 承事郞 臣 陳景著

11. 翰林院檢討 從仕郞 臣 余學夔

12. 翰林院檢討 從仕郞 臣 劉永清

13. 翰林院檢討 從仕郞 臣 黃壽生

14. 翰林院檢討 從仕郞 臣 陳用

15. 翰林院檢討 從仕郞 臣 陳璲

16. 翰林院 五經博士 迪功郞 臣 王進

17. 翰林院典籍 修職佐郞 臣 黃約仲

18. 翰林院庶吉士 臣 涂順

19. 奉議大夫 禮部郞中 臣 王羽

20. 奉議大夫 兵部郞中 臣 童謨

21. 奉訓大夫 禮部員外郞 臣 吳福

22. 奉直大夫 北京行部 員外郞 臣 吳嘉靜

23. 承直郞 禮部主事 臣 黃裳

24. 承德郞 刑部主事 臣 段民

25. 承直郞 刑部主事 臣 洪順

26. 承直郞 刑部主事 臣 沈升

27. 承德郞 刑部主事 臣 章敞

28. 承德郞 刑部主事 臣 楊勉

29. 承德郞 刑部主事 臣 周忱

30. 承德郞 刑部主事 臣 吳紳

31. 文林郞 廣東道監察御史 臣 陳道潛

32. 承事郞 大理寺 評事 臣 王選

33. 文林郞 太常寺 博士 臣 黃福

34. 修職郞 太醫院 御醫 臣 趙友同

35. 迪功佐郞 北京國子監 博士 臣 王復原

36. 泉州府 儒學敎授 臣 曾振

37. 常州府 儒學教授 臣 廖思敬

38. 蘄州 儒學學正 臣 傅舟

39. 濟陽縣 儒學敎諭 臣 杜觀

40. 善化縣 儒學敎諭 臣 顔敬守

41. 常州府 儒學訓導 臣 彭子斐

42. 鎭江府 儒學訓導 臣 留季安

 

詩傳大全凡例 畢

posted by 취상
:
한문학/시경 2022. 10. 22. 22:25

※이 글은 학민문화사에서 출판한 『시전 부언해(詩傳 附諺解)』에 실려 있는 것을 기준으로 번역하였다.

望八重講一部『毛詩』, 追憶甲寅, 誠是料表. 孔聖刪正, 是經居一, 感發善心, 懲創逸志, 其況「二南」卽『書』「二典」, 樂而不淫, 哀而不傷, 詩人性情尤可驗矣. 其篇三百, 一言蔽之, 若問維何, 曰'思無邪', 當法祖宗古人攸訓.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모시』를 다시 익히며 갑인년(1734년, 영조 10년)을 추억하니 진실로 뜻밖이다. 공자께서 산정하신 것 중에 이 경전이 하나를 차지하니, 선한 마음을 감발시키고 안일한 뜻을 꾸짖는다. 그 하물며 이남(「주남」과 「소남」)은 곧 『서경』의 이전(「요전」과 「순전」)이니, 즐겁기는 하나 음탕하지는 않고, 슬프기는 하나 상하지는 않으니, 시인의 성정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그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덮는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고 할 것이니, 응당 조종과 옛 사람들이 가르친 바를 본받아야 한다.

思無邪: 『논어』 「위정」에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덮는다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라는 구절이 보인다.

百邪日去, 一敬堅持, 緝熙堂中, 仰覩『御詩』, 不惑之年, 莫能見效, 從心之文只誦, 靦然. 其雖然矣, 蓋聞於古, '作之不已, 乃成君子.', 暮年復講, 自强自勉, 心許宗國, 罔敢放忽. 莫云衰耄, 道豈遠哉? 其尤異者, 此月始講, 慷慨題弁, 醒我靈臺.

온갖 사악한 것을 날마다 버리려면 敬 하나를 굳게 지켜야 한다는 집희당 안의 『어시』를 우러러보니1), 불혹(40세)의 해에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종심(70세)에 글을 다만 외우기만 해서 부끄럽다. 비록 그러하나 옛날 듣기로 '끊임없이 노력하면 군자가 된다.'라고 하니, 만년에 다시 익혀서 스스로 힘써서 국가에 마음을 허여하고 감히 방심하여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 노쇠하고 늙었다고 말하지 말라, 도가 어찌 멀겠는가? 더욱 기이한 것은, 이 달에 익히기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강개하여 서문을 지으니, 내 마음을 깨우려고 한다.

不惑,  從心: 『논어』 「위정」에 '사십 세에 미혹되지 않았다.[四十而不惑]', '칠십 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구절이 보인다.

弁文: 서문

'作之不已, 乃成君子.'는 『공총자(孔叢子)』 「집절(執節)」편에 나온다. 다만 『공총자(孔叢子)』에는 '作之不止'로 되어 있다.

靈臺: 마음을 이르는 말.

1) 『영조실록』 영조 17년 7월 24일에서는 숙종이 집희당에서 어제한 시를 언급한다.

성문의 천만 마디 말은, 놓친 곳을 찾아 알게 하려고 한 것이네. 천서는 온전한 덕을 밝혔는데, 인심은 암암리에 흩어져 옮겨 가네. 온갖 사악한 것을 날마다 버리려고 한다면, 敬 하나만을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한다. 춘저에 일이 없는 날에는 항상 스승을 대할 때와 같이 하라.(聖門千萬語, 放處欲求知. 天敍明全德, 人心暗鑠移. 百邪將日去, 一敬必堅持. 春邸無事日, 恒如對傅時.)

歲甲申重陽月旣望題, 令入侍知經筵, 書於卷首, 以示沖子云爾.

갑신년(1764년, 영조 40년) 9월 16일에 지어서 입시한 지경연사로 하여금 권수에 쓰게 하여 어린아이들에게 보인다.

posted by 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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