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논어집주 2020. 2. 14. 14:23

16. 子 知요 니라

공자가 말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남을 알지 못함을 근심해야 한다."

     이면  이라  니라
윤씨가 말했다. "군자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구한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는다. 남을 알지 못하면 옳고 그름과 사특하고 올바름을 혹 분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근심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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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논어집주 2020. 2. 14. 14:15

15-1. 子貢曰 貧而無諂하며 富而無驕면 何如하니잇고 子曰 可也나 未若貧而樂하며 富而好禮者也니라

자공이 말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가능하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못하다."

     하여   이라      하여 이요 하고 하여 리라  하니 하여    하시니 이요 시니라
'諂'는 비굴함이고, '驕'는 자랑하며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가난하고 부유한 사이에 빠져서 스스로 지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가지의 병폐가 있는 것이다.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으면 스스로 지킬 줄 아는 것이지만 가난함과 부유함의 바깥으로 초월할 수 없다. 무릇 '가능하다.'라고 말한 것은 겨우 가능해서 미진한 바가 있다는 말이다. 즐거워한다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져서 그 가난함을 잊을 것이고, 예를 좋아한다면 선에 처함을 편안하게 생각하고 이치에 따름을 즐거워하여 역시 그 부유함을 스스로 알지 못할 것이다. 자공은 재물을 증식시켰으니 아마도 먼저 가난하고 뒤에 부유해져서 일찍이 스스로 지키는 것에 힘을 쓴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써 물음에 부자가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니 대개 그 이미 할 수 있는 것을 허여하고, 그 이르지 못한 것을 힘쓰라는 것이다.
僅 : 겨우 근 胖 : 펴질 반

15-2.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하며 如琢如磨라하니 其斯之謂與인저

자공이 말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자른 듯, 간 듯, 쪼아낸 듯, 갈아낸 듯'이라고 하니, 아마 이것을 말한 것입니까?"

 이라  하고  하니   러니 하고 하여 이나   하니라
시는 《시경·위풍》의 〈기욱〉편이다. 뼈와 뿔을 다루는 사람은 이미 잘라냈는데도 다시 갈고, 옥과 돌을 다루는 사람은 이미 쪼아냈는데도 다시 갈아내니 다스림이 이미 정밀한데 더욱 그 정밀함을 구함을 말한 것이다. 자공이 스스로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음을 지극하다고 여겼는데, 부자의 말을 듣고 또 의리가 무궁하여 비록 얻음이 있더라도 급하게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인용하여 밝힌 것이다.
淇 : 물이름 기 奧 : 벼랑 욱

15-3. 子曰 賜也는 始可與言詩已矣로다 告諸往而知來者온여

공자가 말했다. "사하고는 비로소 《시경》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지나간 것을 알려주자 앞으로 올 것을 아는구나."

往者는 其所已言者요 來者는 其所未言者라 
지나간 것은 이미 말한 것이고 앞으로 올 것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다.

○愚按 此章問答은 其淺深高下 固不待辯說而明矣라 然이나 不切則磋無所施요 不琢則磨無所措라 故로 學者雖不可安於小成而不求造道之極致나 亦不可騖於虛遠而不察切己之實病也니라
내가 살펴보건대, 이 장의 문담은 그 얕고 깊음과 높고 낮음이 진실로 변설을 기다리지 않아도 밝다. 그러나 잘라놓지 않으면 갊을 베풀 곳이 없고, 쪼아놓지 않으면 갈아냄을 둘 곳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작은 성취에 안주하여 도에 나아가는 극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역시 허무하고 먼 곳으로 달려가 자기에게 간절한 실제의 병통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造 : 나아갈 조 騖 : 달릴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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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논어집주 2020. 2. 14. 13:44

14. 子曰 君子食無求飽하며 居無求安하며 敏於事而愼於言하고 就有道而正焉이면 可謂好學也已니라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먹을 때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으며, 거할 때에 편안하기를 구하지 않으며 일을 민첩하게 하고 말을 삼가며, 도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서 바로잡음을 받는다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不求安飽者는 志有在而不暇及也라 敏於事者는 勉其所不足이요 謹於言者는 不敢盡其所有餘也라 然이나 猶不敢自是하고 而必就有道之人하여 以正其是非면 則可謂好學矣라 凡言道者는 皆謂事物當然之理니 人之所共由者也라
편안하고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은 뜻이 다른 곳에 있어서 미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일을 민첩하게 하는 것은 그 부족한 것에 힘쓰는 것이고 말을 삼가는 것은 그 남음이 있는 것을 감히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감히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지 않고 반드시 도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옳고 그름을 바로잡는다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무릇 도라고 말한 것은 모두 사물의 당연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니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아야 할 것이다.

○尹氏曰 君子之學이 能是四者면 可謂篤志力行者矣라 然이나 不取正於有道면 未免有差라 如楊墨이 學仁義而差者也나 其流至於無父無君하니 謂之好學可乎아
윤씨가 말했다. "군자의 배움이 능히 이 네 가지를 할 수 있으면 뜻에 독실하고 행동에 힘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도가 있는 사람에게서 바로잡음을 취하지 않는다면 차이가 생기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가령 양주와 묵적은 인과 의를 배웠지만 차이가 있어 그 흐름이 아버지가 없고 군주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배움을 좋아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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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논어집주 2020. 2. 12. 13:19

13. 有子曰 信近於義면 言可復也며 恭近於禮면 遠恥辱也며 因不失其親이면 亦可宗也니라

유자가 말했다. "약속이 의에 가까우면 말을 실천할 수 있고,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주인을 삼을 때에 그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높여 주인으로 삼을 수 있다."

                이면  이면    이니 이면  니라
'信'은 약속이다. '義'는 일의 마땅함이다. '復'은 말을 실천하는 것이다. '恭'은 공경함을 지극히 하는 것이다. '禮'는 등급을 나누고 문식(文飾)하는 것이다. '因'은 '依(의지함)'과 같다. '宗'은 '主(주인)'과 같다. 말로 약속을 하면서 그 마땅함에 맞게 한다면 말을 반드시 실천할 수 있을 것이고, 공손함을 지극히 하여 그 예절에 맞게 한다면 능히 치욕을 멀리 할 수 있을 것이며, 의지한 바 되는 사람이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았으면 또한 그를 높여서 주인으로 삼을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언행과 교제를 모두 처음부터 마땅히 삼가서 그 마칠 바를 생각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답습하고 구차히 하는 사이에 장차 그 스스로 잃었다는 후회를 감당하지 못함이 있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仍 : 그대로 답습하다 勝 : 감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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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논어집주 2020. 2. 12. 12:36

12-1. 有子曰 禮之用和爲貴하니 先王之道 斯爲美라 小大由之니라

유자가 말했다. "예의 쓰임 중에서 화가 귀하니, 선왕의 도는 이것으로 아름다움을 삼았다. 크고 작은 것이 이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

禮者는 天理之節文이요 人事之儀則也라 和者는 從容不迫之意라 蓋禮之爲體雖嚴이나 然이나 皆出於自然之理라 故로 其爲用이 必從容而不迫이라야 乃爲可貴니 先王之道 此其所以爲美하여 而小事大事無不由之也니라
'禮'는 천리의 등급과 문식(文飾)이고, 인사의 의례와 준칙이다. '和'는 조용하여 급박하게 하지않는다는 뜻이다. 대개 예의 체 됨은 비록 엄하나 모두 자연의 이치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 쓰임이 반드시 조용하고 급박하지 않아야 이에 귀할 만한 것이 된다. 선왕의 도는 이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삼아서 작은 일과 큰 일이 그것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12-2. 有所不行니 知和而和요 不以禮節之면 亦不可行也니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으니 화를 알아서 화를 이루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행할 수 없다."

承上文而言 如此而復有所不行者하니 以其徒知和之爲貴하여 而一於和하고 不復以禮節之면 則亦非復禮之本然矣니 所以流蕩忘反하여 而亦不可行也니라
윗 문장을 받아서 말하기를, '이와 같은데도 다시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으니 다만 화가 귀하다는 것만을 알아서 화에만 한결같이 하고 다시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다시 예의 본연이 아닌 것이며, 이 때문에 방탕하게 흘러가고 돌아옴을 잊어서 또한 행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程子曰 禮勝則離라 故로 禮之用이 和爲貴하니 先王之道 以斯爲美하여 而小大由之요 樂勝則流라 故로 有所不行者하니 知和而和하고 不以禮節之면 亦不可行이니라
정자가 말했다. "예에 치우치면 지리해진다. 그러므로 예의 쓰임 중에서 화가 귀하니 선왕의 도는 이로써 아름다움을 삼아서 크고 작은 일이 그것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악에 치우치면 흘러간다. 그러므로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으니 화를 알아서 화를 이루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행할 수 없다."

范氏曰 凡禮之體는 主於敬이요 而其用則以和爲貴하니 敬者는 禮之所以立也요 和者는 樂之所由生也라 若有子면 可謂達禮樂之本矣로다
범씨가 말했다. "무릇 예의 체는 경을 주장하고 그 쓰임은 화를 귀하게 여긴다. 경은 예가 이루어지는 까닭이고 화는 악이 생기는 까닭이다. 유자의 경우에는 예와 악의 근본에 통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愚謂 嚴而泰和而節은 此理之自然이요 禮之全體也니 毫釐有差면 則失其中正하여 而各倚於一偏이니 其不可行이 均矣니라
내가 생각하건대 엄하면서도 편안하고, 화하면서 절제하는 것은 이 이치의 자연스러움이고 예의 전체이니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그 중정을 잃어버려서 각각 한쪽으로 치우칠 것이니 그 행할 수 없는 것이 똑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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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논어집주 2020. 2. 12. 12:34

11. 子曰 父在觀其志요 父沒觀其行이나 三年無改於父之道라야 可謂孝矣니라

공자가 말했다.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그 뜻을 보고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그 행동을 보아야 하나 3년 동안 아버지의 도에 고침이 없어야 효라고 이를 만하다."

父在子不得自專이나 而志則可知요 父沒然後其行可見이라 故로 觀此足以知其人之善惡이라 然이나 又必能三年無改於父之道라야 乃見其孝니 不然이면 則所行雖善이나 亦不得爲孝矣니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엔 자식이 스스로 제멋대로 할 수 없으나 뜻은 알 수 있고,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그 행동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선악을 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3년 동안 아버지의 도에 고침이 없어야 이에 그 효를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행동하는 것이 비록 선하더라도 또한 효라고 할 수 없다. 
專 : 專橫

○尹氏曰 如其道면 雖終身無改라도 可也어니와 如其非道면 何待三年이리오 然則三年無改者는 孝子之心에 有所不忍故也니라 
윤씨가 말했다. "그 도와 같다면 비록 종신토록 고침이 없어도 좋지만 그 비도와 같다면 어찌 3년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3년 동안 고침이 없다는 것은 효자의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游氏曰 三年無改는 亦謂在所當改而可以未改者耳니라

유씨가 말했다. "3년 동안 고침이 없다는 것은 또한 마땅히 고칠 것이 있지만 아직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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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논어집주 2020. 2. 6. 16:09

10-1.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하사 必聞其政하시나니 求之與아 抑與之與아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 "부자께서 어떤 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정사를 들으시니 구해서입니까 아니면 주어서입니까?"

 이요 이며  이요     라하니   
자금은 성이 陳이고 이름은 亢이며, 자공은 성이 木이고 이름은 賜다. 모두 공자의 제자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항은 자공의 제자라 하는데, 누가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抑'은 반어사이다.

10-2. 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시니 夫子之求之也는 其諸異乎人之求之與인저

자공이 말했다. "부자께서는 온화하시고, 어지시고, 공손하시고, 검소하시고, 겸손하시어 그것을 얻으시니, 부자의 구하는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의 구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하여    이나 이나 이면   니라 
'溫'은 화하고 후한 것이다. '良'은 평평하고 곧은 것이다. '恭'은 씩씩하고 공경스러운 것이다. '儉'은 절제하는 것이다. '讓'은 겸손한 것이다. 다섯 가지는 부자의 성한 덕의 광휘가 다른 사람들에게 접하는 것이다. '諸'는 어조사이다. '人'은 타인이다. 부자가 일찍이 그것을 구하지 않았으나 단지 그 덕스러운 용모가 이와 같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군주가 공경하고 믿어서 스스로 그 정사로써 나아와서 물었을 뿐이며, 다른 사람이 반드시 그것을 구한 다음에 얻는 것과는 같지 않다. 성인이 지나가면 교화되고 마음속에 보존하면 신묘해지는 묘함을 쉽게 엿보아 측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곧 이것을 가지고 관찰한다면 그 덕이 성함과 예가 공손해서 외면에서 원하지 않았음을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침착하게 하고 힘써 배워야 할 것이다. 
易 : 평탄할 이

 이면  이면    이로되  하면 使어든  
사씨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이 성인의 위엄과 거동의 사이에서 관찰한다면 또한 덕을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자공의 경우는 또한 성인을 잘 관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덕행을 잘 말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성인과 떨어진 거리가 천오백년인데 이 다섯 가지로써 그 형용을 상상하여 본다면 아직도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일어나게 하는데, 하물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겠는가."
炙 : 스승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음

 하사 이로되      니라
장경부가 말했다. "부자께서 어떤 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정사를 들으셨는데 능히 나라를 맡겨서 정사를 맡긴 사람은 있지 않았다. 대개 성인의 거동과 모습을 보고 그에게 고하기를 즐거워한 사람은 떳떳함을 잡고 덕을 좋아하는 어진 마음을 가졌으나 사사로운 욕망이 해친 것이다. 이 까닭으로 끝내 등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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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논어집주 2020. 2. 6. 15:35

9. 曾子曰 愼終追遠이면 民德이 歸厚矣리라

증자가 말했다. "상례를 신중히 하고 오랜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

   이라  하여   어늘 하고  어늘       니라
'終'은 상례에 그 예를 다하는 것이고, '遠'은 제사에 그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간다.'는 아래 백성이 교화되어 그 덕이 또한 후한 데로 돌아가는 것을 말함이다. 대개 마치는 것은 사람이 소홀이 여기기 쉬운 것이나 능히 삼갈 수 있고, 먼 조상은 사람이 잊기 쉬운 것이나 능히 추모할 수 있으면 후한 덕이다. 그러므로 이로써 스스로 한다면 자기의 덕이 후해지는 것이고, 아래 백성이 교화되면 그들의 덕이 또한 후한 데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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