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繫年』 역주 2021. 8. 15. 19:43

본 게시글의 이미지나 석문, 번역 또는 주석을 다른 곳에 활용하실 경우에는 출처(닉네임블로그 이름URL 링크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를 밝혀주세요.

『계년』은 청화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국시대 죽간에 포함되어 있는 문헌입니다. 이 문헌에는 본래 제목이 없으나,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칭화대학에서는 정리하면서 繫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학자들은 이 문헌이 초 숙왕(楚 肅王) 때 기록된 것으로 여기는데, 그렇다면 『죽서기년(竹書紀年)』보다 오래된 것입니다. 『계년』은 총 138개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간의 훼손을 제외하고는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문헌은 기존 전래문헌인 『사기(史記)』, 『국어(國語)』, 『좌전(左傳)』 등에 누락되어 있는 이야기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이하 저본)에 나온 도판과 석문을 가지고 간단한 번역과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繫年』 1장은 1호간부터 4호간까지 총 4매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건국, 그리고 주나라의 10대 왕인 여왕(厲王)의 축출과 공백(共伯) 화(和)의 통치, 주나라 11대 왕인 선왕(宣王)의 즉위, 견융(犬戎)의 주나라 침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각 죽간에는 대략 28~29자가 쓰여 있습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西周의 사적을 서술하고 있는데, 주나라 왕실이 어떻게 쇠락했고 진(晉)나라, 정나라, 초나라, 진(秦)나라, 위(衛)나라 등의 제후국들이 어떻게 주나라를 대신하여 패권을 잡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확대한 1호간, 2호간, 3호간, 4호간

『계년』은 초나라의 옛 글자체로 쓰여 있어 쉽게 읽을 수 없습니다. 상고 시대 사람들은 글을 쓰면서 통가를 활발하게 한 데다가 상고 시대 사람들이 썼던 한자가 세월이 지나면서 도태되어 사라진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 글을 더욱 읽기 어렵게 합니다. 아래 이미지는 참고 문헌을 토대로 고문자를 예정(隸定, 옛 글씨체를 현대의 글씨체로 옮기는 일)한 것입니다. 통가자의 경우 본자를 밝혔습니다.

위 이미지를 토대로 표점을 달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周武王監觀王之不恭上帝1),禋祀不寅2),乃作帝籍3),以烝4)祀上帝天神名之曰千畝5),以克反6)商邑,敷政天下7),至于8)厲王厲王大虐于,卿士、諸正9)、萬民弗忍于厥心,乃歸10)厲王11)12)伯和13)。十又四年,厲王宣王宣王卽位14)共伯和歸于宗15)宣王是始棄帝籍弗田16),立卅又九年,乃大敗師于千畝17)

옛날 주 무왕께서 상나라 왕이 상제를 공경하지 않은 것과 인 제사가 공경스럽지 않음을 보고 곧 제적(왕이 직접 경작하는 밭)을 만들어서 상제와 천신께 증 제사를 지냈으니, 그곳을 이름하여 천무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상읍을 전복시키고 천하에 정치를 펴다가 여왕 대에 이르러 여왕이 주나라를 크게 학대하니, 경사와 모든 장로와 만민이 그 마음을 용인하지 않았다. 곧 여왕을 체 땅으로 쫓아내니, 공백 화가 섰다. 14년 뒤, 여왕이 선왕을 낳았고, 선왕이 즉위하였으니, 공백 화는 그 종국(宗國)인 위(衛)나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선왕, 이 왕은 비로소 제적을 폐기하고 밭을 갈지 않았다. 즉위한 지 39년, 융적이 곧 천무에서 주나라 군사를 크게 패배시켰다.


1)上帝에 붙은 =는 합문 부호이다.

2)寅은 공경하다의 의미이다. 『爾雅』 「釋詁」에 ‘儼,恪,祇,翼,諲,恭,欽,寅,熯,敬也。’라고 되어 있다.

3)帝籍은 왕이 직접 경작하는 전적(田籍)이며, 천자의 상징적인 친경지(親耕地)이다. 여기에서 籍은 『國語』 「周語 上」의 빌린다는 것은 백성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다.’(‘借也借民力以爲之’)라는 주석에 따라 ‘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田籍은 고대의 천자 또는 제후가 백성들의 인력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밭이다. 전적의 규모는 천자가 1천 무, 제후가 1백 무이다.

4)저본에서는 ⿱登示 형태의 글자를 登으로 석문하고 『禮記』 「月令」의 농부는 이에 기장을 진상한다.’(‘農乃登黍’)라는 문장을 근거로 ‘진상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陳民鎭은 「略說清華簡《繫年》的“烝”」이라는 2012년 글에서 같은 글자를 示라는 형부와 登이라는 성부가 결합한 것으로 보고 제사 이름으로 파악하여 烝으로 석문하고 ‘제사의 일종’으로 풀이하였다. 여기서는 후자를 따른다.

5)천무는 주나라 무왕이 설치한 전적의 이름이다.

6)反은 『說文解字』에 ‘反,覆也。’로 풀이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克과 함께 쓰여 전복시키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7)『詩經』 「商頌」의 長發 편에 너그러이 정사를 베푸시네.’(‘敷政優優’)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8)至于에 붙은 =는 합문 부호이다.

9)正은 『爾雅』 「釋詁」의 ‘育,孟,耆,艾,正,伯,長也。’에 따라 ‘우두머리, 장관’의 의미로 해석한다.

10)여기서 歸는 단순히 '돌아가다' 내지 '가다'의 의미가 아니라, '가서 돌아오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周禮』 「大宗伯」의 주석에 歸를 '不反之稱'으로 푼 예시가 있다.

11)徹은 초나라 죽간에서 育攵로 쓰인다. 한편, 전래문헌(左傳』 昭公 26 至于厲王王心戾虐萬民弗忍居王于彘’)에 의하면 여왕이 쫓겨난 곳은 彘 땅이다. 彘와 徹은 상고에 발음이 비슷하였으므로, 통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여왕이 彘 땅으로 쫓겨나게 된 경위에 대한 서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여왕이 자의로 땅으로 도망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왕이 타의로 彘 땅에 유치되었다는 것이다.  史記』 「周本紀」의 '王行暴虐侈傲國人謗王(중략) 於是國莫敢出言三年乃相與畔襲厲王厲王出奔於彘。'라는 기록과 晉世家」의  '國人作亂厲王出奔于彘。'라는 기록, 그리고 금본 『竹書紀年』의 '十二年王亡奔彘。', '十三年王在彘共伯和攝行天子事。', '二十六年大旱王陟于彘。'라는 기록은 전자에 속한다. 반면에 『左傳』 소공 26년의 '至于厲王王心戾虐萬民弗忍居王于彘。'라는 기록과 『國語』 周語上」의 '厲王虐國人謗王(중략) 三年乃流王于彘。'라는 기록은 후자에 속한다. 繫年』의 기록은 경사와 여러 장로, 주나라 국민의 타의에 의해 체 땅으로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左傳』과 『國語』의 기록과 가깝다.

12)은 『繫年』, 특히 동일한 3호간 안에서도 으로 쓰이기도 하고, ⿱龍丌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共和의 성격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기록이 다르다. 『史記』 「周本紀」에서는 '召公周公二相行政號曰共和共和十四年厲王死于彘。'라고 하고, 晉世家」에서는 '國人作亂厲王出奔于彘大臣行政故曰共和。'라고 하여 召公周公 또는 대신들의 공동 행정으로 기술하고 있다. 반면 今本 『竹書紀年』에서는 '十三年王在彘共伯和攝行天子事。'라고 하여 共伯 和라는 사람의 섭정이라고 기술하고 있고, 古本 『竹書紀年』에서는 '共伯和于王位。'라고 하여 공백 화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繫年』에 등장하는 공백 화는 『죽서기년』에 나오는 '공백 화'와 가깝다.

13)공화 시기 14년과 여왕이 체 땅에서 죽은 것, 선왕이 즉위한 것에 대해서는 『사기』, 두 판본의 『죽서기년』, 『계년』의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

14)선왕은 여왕의 아들이지만 여왕이 이때 선왕을 낳은 것은 아니다.

15)『繫年』의 본문에는 宋으로 쓰여 있는데, 땅은 위()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공백 화는 송()나라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여 저본에서는 宋을 宗의 오자로 보았다. 『史記正義』 「周本紀에서는 『魯連子』를 인용하여 공백 화가 위나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 자형이 비슷하기에 잘못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宗國을 가리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위나라를 가리키게 된다.

16)선왕이 제적을 폐지했다는 것은 『國語』 周語上宣王이 즉위하자 천무의 적전을 폐지하였다.’(‘宣王即位不籍千畝’)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17)선왕이 즉위한 지 39년 후에 융적이 천무에서 주나라 군사를 대패시켰다는 것은 『國語』 周語上‘(宣王) 39년에 천무에서 전투하였는데, 왕의 군대가 강씨의 융에게 크게 패하였다.’(‘三十九年戰于千畝王師敗績于姜氏之戎’)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은 장의 종결을 나타내는 부호이다.


참고문헌

저본)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

김석진(金錫珍), 「‘짓고 추려서 엮은’ 周王室의 역사 이야기」, 『중국고중세사연구』 Vol.0 No.46, 중국고중세사학회, 2017

陳民鎮, "略說清華簡《繫年》的“烝”", 簡帛網-武漢大學簡帛硏究中心, 2012년 03월 17일 수정, 2021년 8월 15일 접속, http://www.bsm.org.cn/show_article.php?id=1653.

'한문학 > 『繫年』 역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년(繫年)』4장  (0) 2022.01.23
『계년(繫年)』3장  (0) 2021.11.06
『계년(繫年)』2장  (0) 2021.09.12
posted by 취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