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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繫年』 4장은 17호간부터 22호간까지 총 6매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나라의 분봉과 천도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위 이미지를 토대로 표점을 달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周成王、周公旣遷殷民于洛邑1),乃追念夏商之亡由2),旁設出宗子3),以作周厚屛4),乃先建衛叔封于康丘5),以侯殷之餘民6)。衛人自康丘遷于淇衛7)。周惠王立十又七年,赤翟王留吁起師伐衛8),大敗衛師於睘9),幽侯滅焉10)。翟遂居衛,衛人乃東涉河,遷于曹11),立戴公申12),公子啟方奔齊13)。戴公卒14),齊桓公會諸侯以城楚丘15),□公子啟方焉,是文公16)。文公卽世,成公卽位。翟人或涉河,伐衛于楚丘,衛人自楚丘遷于帝丘17)。
주 성왕과 주공이 이미 은나라 백성을 낙읍으로 옮긴 뒤에, 하나라와 상나라가 망한 이유를 추념하여(또는 하나라와 상나라가 자손이 없는 이유를 추념하여), 널리 출종자(支子)를 세워 주나라의 두꺼운 병풍을 만들었다. 이에 먼저 위숙 봉을 강구에 세우고, 은나라의 남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후작으로 봉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강구에서 기위로 옮겼다. 주 혜왕이 선 지 17년, 적적왕 유우가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정벌하여 위나라 군사를 경(=형택)에서 크게 패배시키니, 유후가 멸망하였다. 적이 마침내 위나라에 거하니, 위나라 사람들은 이에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조로 옮겼다. 대공 신을 세우니, 공자 계방이 제나라로 달아났다. 대공이 죽자, 제 환공이 제후들과 회합하여 초구에 성을 쌓고, 공자 계방을 <세우니>, 이가 문공이다. 문공이 죽자, 성공이 즉위하였다. 적 사람들이 혹 황하를 건너 초구에서 위나라를 정벌하니, 위나라 사람들이 초구에서 제구로 옮겼다.
1) 『書經』 「多士」의 書序에 ‘성주가 완성되자 은나라의 완고한 백성을 옮겼다.(成周旣成,遷殷頑民。)’라고 하였으며, 『史記』 「周本紀」에도 ‘성왕이 풍에 거하며 소공으로 하여금 낙읍을 다시 경영하게 하여 무왕의 뜻대로 하였다.(成王在豐,使召公復營洛邑,如武王之意。)’, ‘성왕이 은나라의 유민을 옮겼다.(成王旣遷殷遺民。)’라고 하여 비슷하게 서술되어 있다.
2) 정리자는 亡由를 ‘멸망한 원인’으로 해석했으나, 華東師範大學中文系戰國簡讀書小組(이하 華東師範大學)은 亡을 無로, 由를 冑로 해석하여 ‘자손이 없음’으로 해석하였다.
3) 方은 旁과 통하며, 『廣雅』에 ‘廣也。’라고 되어 있으므로 ‘넓다, 널리’로 해석한다. 出宗子는 支子(맏아들 이외의 아들)를 가리키며, 『左傳』 昭公 9년, 26년의 ‘동복동생을 세워 주나라의 울타리가 되게 하였다.(建母弟,以蕃屛周。)’의 母弟와 같다.
4) 『左傳』 僖公 24년에 ‘옛날에 주공은 관숙과 채숙(二叔)이 불화했던 것을 불쌍히 여겼으므로 친척을 봉하여 주나라의 울타리로 삼았다.(昔周公弔二叔之不咸,故封建親戚,以蕃屛周。)’라고 되어 있다. 또, 주3에 보이는 昭公 9년, 26년의 기사도 친척을 봉해 주나라의 변경으로 삼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5) 衛叔封은 곧 康叔이다. 『左傳』 定公 4년에 ‘『강고』로 명하여 은허에 봉했다.(命以≪康誥≫而封於殷虛。)’라고 하였다. 『史記』 「衛康叔世家」에는 강숙의 이름이 封이라고 하였다. 정리자는 庚丘는 곧 康丘이며, 그 땅은 은나라의 옛 땅 邶, 鄘, 衛 중 衛의 범위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그렇다면 康叔은 衛叔封이라고 부를 수 있다.
6) 은나라의 남은 백성이란 『左傳』 定公 4년에 서술된 殷民七族을 가리킨다. 곧, 陶氏, 施氏, 繁氏, 錡氏, 樊氏, 饑氏, 終葵氏이다.
7) 정리자에 의하면 淇衛는 기수 유역에 있는 朝歌를 가리키며,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치현(淇縣)이다.
8) 華東師範大學은 전세문헌에 언급되지 않은 赤翟王의 이름을 『左傳』 宣公 16年의 ‘봄, 주력 정월에 진나라 사람이 赤狄 甲氏와 留吁를 멸하였다.(春,王正月,晉人滅赤狄甲氏及留吁。)’ 라는 기록에 의거하여 留吁로 읽는다. 또한 簡文의 ‘留’ 字는 从屮从古文“酉” 글자이고, ‘吁’ 字는 从虎从口 글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留吁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씨족의 이름이나 민족의 이름을 그 우두머리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경우를 열거하며, 여기서 留吁는 赤翟王의 호칭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것을 따른다. 한편, 이 해 赤翟이 위나라를 침입한 일은 『左傳』 閔公 2년과 「衛康叔世家」에 보인다. 『좌전』 민공 2년의 경문에서는 ‘12월, 적이 위나라를 침입하였다.(十有二月,狄入衛。)’라고 하였으며, 「위강숙세가」에서는 ‘의공이 즉위하였다. 9년, 적이 위나라를 정벌하였다.(懿公卽位,…九年, 翟伐衛。)’라고 하였다. 또, 고본 『竹書紀年』에 이르기를, ‘위 의공과 적적이 형택에서 싸웠다.(衛懿公及赤翟戰于洞[泂]澤。)’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赤翟은 마땅히 狄을 가리킨다.
9) 위나라 군사가 크게 패한 곳이 『左傳』에서는 ‘熒澤’으로 되어 있으며, 『죽서기년』에서는 주8에도 보이듯이 ‘洞[泂]澤’으로 되어 있다. 정리자는 熒과 泂이 모두 匣母耕部 글자이므로 서로 통가될 수 있다고 여겼으며, 簡文의 睘는 群母耕部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통가될 수 있다고 여겼다.
10) 狄에 의해 멸망한 衛侯는 『左傳』과 「衛康叔世家」에서는 懿公이라고 하였고, 『論衡』 「儒增」에서는 哀公이라고 하였다. 簡文에서는 幽侯라고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 정리자는 이것이 시법의 차이라고 하였으며, 華東師範大學은 簡文의 幽侯가 懿公의 오자라고 주장하였다. 小寺敦는 蘇建洲, 吳雯雯, 賴怡璇의 『淸華二《繫年》集解』를 인용하여, 影母幽部 글자인 幽를 影母脂部의 開口三等 글자인 懿와 影母微部의 開口一等 글자인 哀의 통가자로 읽는 독법을 소개하였지만, 그 자신은 무리하게 가차자로 여길 필요가 없으며, 일단 그대로 두고 해석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11) 위나라가 曹로 천도한 일은 『左傳』 閔公 2년에 보이는데, ‘대공을 세우고 조나라에 거처하였다.(立戴公,以廬于曹。)’라고 되어 있다. 曹는 漕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詩經‧鄘風‧載馳』의 詩序에서는 ‘위 의공이 狄人에게 멸망당하여 나라 사람들이 흩어져 漕邑에서 이슬을 맞았다.(衛懿公爲狄人所滅,國人分散,露於漕邑。)’라고 되어 있다. 曹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화현(滑縣) 서남쪽으로 비정하였다.
12) 悳과 戴는 성모가 같으며, 職之對轉에 속한다. 「衛康叔世家」에서는 戴公의 이름이 申이라고 하였다.
13) 公子啟方은 簡文에 따르면 衛 文公이다. 「衛康叔世家」에서 위 문공의 이름은 燬이기 때문에 簡文과 서로 다르다. 정리자는 公子啟方이 『管子』 「大匡」에 나오는 제 환공의 신하 公子開方이라고 보았다. 華東師範大學은 『左傳』 閔公 2년의 ‘문공은 위나라에 화란이 많음으로 인해 먼저 제나라에 가 있었다.(文公爲衛之多患也,先適齊。)’라는 기록과 簡文의 ‘대공을 세우자, 공자 계방이 제나라로 달아났다.(立戴公申,公子啟方奔齊。)’라는 기록이 서로 모순됨을 지적했다. 곧, 『좌전』의 기록대로라면 공자 계방은 대공이 즉위하는 기원전 660년 당시 이미 제나라로 가서 위나라에 없어야 하지만, 『계년』의 기록대로라면 공자 계방은 기원전 660년 대공이 즉위하기까지는 위나라에 있던 것이 된다. 小寺敦은 비록 전래문헌에서 啟方이 위 문공의 이름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簡文의 문맥으로 볼 때 公子啟方이 위 문공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
14) 정리자에 의하면, [⿱戠𦣻]은 从戠 글자로, 章母職部에 속하며, 端母 글자인 戴와 통가된다고 보았다. 章계인 周와 週가 端계인 彫, 雕, 調과 서로 해성(諧聲) 관계에 있는 것을 볼 때, 정리자의 설은 타당하다.
15) 초구에 성을 쌓은 일은 『左傳』 僖公 2년에 보인다. 『좌전』 희공 2년 경에 ‘주력 정월, 초구에 성을 쌓았다.(王正月,城楚丘。)’라고 하였다. 楚丘는 지금의 (河南省) 화현(滑縣) 동쪽이다.
16) 華東師範大學은 20호간 마지막의 마멸된 글자를 立으로 추정하였다. 小寺敦은 문맥에 따르면, 마멸된 글자는 마땅히 ‘公子 啟方을 옹립한다.’라는 의미의 글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마멸된 글자를 섣불리 추정하지는 않았다. 여기서도 일단 마멸된 글자를 비워 두고, 簡文의 문맥에 따라 ‘公子 啟方을 세운다’라고 해석하였다. 한편, 위나라가 초구로 천도한 일에 대해 『詩經‧鄘風‧定之方中』의 詩序에서는 ‘위나라가 적에게 멸망당하자, 동쪽으로 옮겨 황하를 건너고, 漕邑에서 野處하니, 제 환공이 융적을 물리치고 봉해 주었다. 문공이 초구로 거처를 옮기고, 성과 시장을 세우고 궁실을 경영하기 시작하여 때에 맞는 제도를 얻으니, 백성이 기뻐하여 국가가 강대해지고 부유해졌다. (衛爲狄所滅,東徒渡河,野處漕邑。齊桓公攘戎狄而封之。文公徒居楚丘,始建城市而營宮室,得其時制,百姓說之,國家殷富焉。)’라고 하였다.
17) 적이 위나라를 포위하고 위나라가 제구로 천도한 일은 『左傳』 僖公 31년에 보인다. 『좌전』 희공 31년 경에 ‘적이 위나라를 포위하였다. 12월, 위나라가 제구로 천도하였다.(狄圍衛。十有二月,衛遷于帝丘。)’라고 하였다. 「衛康叔世家」 集解에서는 『世本』을 인용하여 ‘성공이 복양으로 옮겼다.(成公徙濮陽。)’라고 하였는데, 濮陽은 곧 顓頊의 고도 帝丘이며, 지금의 허난성(河南城) 푸양(濮陽) 시 서남쪽이다.
저본)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
華東師範大學中文系戰國簡讀書小組, 「讀《清華大學藏戰國竹簡(貳)․繫年》書後(二)」, 武漢大學簡帛網, 2011-12-30. URL: http://www.bsm.org.cn/?chujian/5799.html
小寺敦, 「清華簡『繫年』譯注・解題」, 『東洋文化研究所紀要』 第170冊,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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