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繫年』 역주 2021. 9. 12.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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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繫年』 2장은 5호간부터 12호간까지 총 8개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포사 이야기, 주나라의 멸망, 주나라의 동천, 진(晉)나라, 정나라, 초나라의 확장과 정 장공(莊公) 사후 정나라의 왕위 분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확대한 5호간, 6호간, 7호간, 8호간, 9호간
왼쪽부터 확대한 10호간, 11호간, 12호간

아래 이미지는 참고 문헌을 토대로 고문자를 예정하고 통가자의 경우 본자를 밝힌 것입니다. 죽간에 기록된 문자의 양이 꽤 많기 때문에 두 개로 나누었습니다.

위 이미지를 토대로 표점을 달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周幽王取妻于西申1),生平王,王或取褒人之女2),是褒姒,生伯盤3)。褒姒嬖于王,王與伯盤逐平王,平王走西申4)。幽王起師,圍平王于西申,申人弗畀,繒人乃降西戎,以攻幽王5),幽王及伯盤乃滅,周乃亡。邦君、諸正乃立幽王之弟余臣于虢6),是攜惠王7)。立二十又一年,晉文侯仇乃殺惠王于虢8)。周亡王九年9),邦君、諸侯焉始不朝于周,晉文侯乃逆平王于少鄂10),立之于京師11)。三年,乃東徙,止于成周,晉人焉始啟于京師12),鄭武公亦正東方之諸侯13)。武公卽世14),莊公卽位,莊公卽世,昭公卽位15)。其大夫高之渠彌殺昭公而立其弟子眉壽16)。齊襄公會諸侯于首止,殺子眉壽,車轘高之渠彌,改立厲公17),鄭以始正18)。楚文王以啟于漢陽19)

주 유왕은 서신에서 아내를 취하여 평왕을 낳았다. 왕은 또 포나라 사람의 딸도 취하였으니, 이 사람이 포사로, 백반을 낳았다. 포사는 왕에게 사랑을 받았고, 왕과 백반은 평왕을 축출하였으니, 평왕은 서신으로 달아났다. 유왕이 군사를 일으켜 평왕을 서신에서 포위하였는데, 신나라 사람들은 넘겨주지 않았고, 증 사람들은 이에 서융을 끌어들여 유왕을 공격하니, 유왕과 백반이 이에 죽고, 주나라는 이에 멸망하게 되었다. 방군과 제정이 이에 유왕의 아우 여신을 괵 땅에서 옹립하였으니, 이 사람이 휴혜왕이다. 즉위 21년에 진나라 문후 구가 혜왕을 괵 땅에서 죽였다. 주나라에 왕이 없어진 지 9년, 방군과 제후가 이때 주나라에 조회하지 않기 시작하자, 진나라 문후가 이에 평왕을 소악 땅에서 맞이하여 그를 경사 땅에서 옹립하였다. 3년 뒤에 동쪽으로 옮겨 성주 땅에 이르자, 진나라 사람들이 이때 경사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정나라 무공 또한 동방의 제후들을 다스렸다. 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장공이 즉위하였고, 장공이 세상을 떠나자 소공이 즉위하였다. 그 대부 고거미가 소공을 죽이고 그 아우 자미 수를 옹립하였다. 제나라 양공이 수지 땅에서 제후들과 회합하여 자미 수를 죽이고 고거미를 거열형에 처했다. 여공을 고쳐 세우니, 정나라가 다스려지기 시작했다. 초나라 문왕은 한양 땅에 진출하였다.


1) 『史記』 「周本紀」에는 유왕(幽王)의 왕후가 신나라 후작의 딸[申侯女]로 되어 있다.

2) 孚는 『國語』 「晉語 一」과 「鄭語」, 『史記』 「周本紀」 등에 모두 褒로 되어 있다. 상고에 음이 서로 비슷했으므로 서로 통가한 것이다.

3) 伯盤은 기존의 伯服과 동일 인물이다. 方詩銘과 王修齡의 『古本竹書紀年輯證』(修訂本) 59~60p에 의하면, 伯服 쪽이 오류이다. 『國語』 「鄭語」나 『史記』 「周本紀」 같은 곳에는 伯服으로 되어 있고, 『太平御覽』 卷85에는 伯盤으로 되어 있다. 『商書』의 盤庚이 갑골문과 『國語』에서는 般庚으로 서사되고, 『尙書』의 甘盤이 『史記』 「燕世家」에서는 甘般으로 서사되는 것처럼 盤은 흔히 생략형인 般으로 서사되는데, 이것은 服과 형태가 비슷하기 때문에 『國語』, 『史記』 등에서 盤을 服으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4) 『左傳正義』 昭公 26年 조에서는 『紀年』을 인용하여 평왕이 서신으로 출분하였고, 백반이 태자로 옹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平王奔西申,而立伯盤以爲大子。’).

5) 『國語』 「鄭語」에서 ‘신나라, 증나라, 서융은 한창 강해지고 있고 왕실은 한창 소란스러워지고 있는데 마음대로 욕심을 부리려고 하니 어려워지지 않겠는가? 왕이 태자를 죽이고 백복을 태자로 만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신나라에서 구할 것이니, 신나라 사람들이 내어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벌할 것이다. 만약 신나라를 정벌한다면 증나라와 서융이 힘을 모아 주나라를 칠 것이니 주나라는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申、繒、西戎方強,王室方騷,將以縱欲,不亦難乎?王欲殺太子以成伯服,必求之申,申人弗畀,必伐之。若伐申,而繒與西戎會以伐周,周不守矣!’)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상황을 가리킨다.

6) 邦君은 제후를 가리킨다. 正은 ‘長’의 의미이다. 『左傳』 昭公 26년의 ‘幽王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주나라를 돕지 않아 왕이 혼미하여 도리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왕위를 잃었고 攜王이 천명을 범했다.’(‘至于幽王,天不弔周,王昏不若,用愆厥位,攜王奸命。’)라는 기사에 대해 『左傳正義』는 『紀年』을 인용하여 幽王이 죽자 虢公 翰이 왕자 余臣을 攜 땅에서 세워 두 왕이 병립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幽王旣死,而虢公翰又立王子余臣於攜,周二王並立。’). 簡文의 ‘虢’은 그때 이미 지금의 河南 三門峽으로 천도했을 수 있는 西虢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余 밑에 있는 口는 순전히 장식적인 필획으로, 특별한 의미 없이 서사되는 경우가 많다. 왕자 余臣이 幽王의 동생이라는 것은 『繫年』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다.

7) 攜는 지명으로 보인다. 雷學淇은 『竹書紀年義證』 卷27에서 ‘『新唐書』에서 전재된 『大衍曆議』에 豊, 岐, 驪, 攜 지역이 모두 鶉首의 分野이고, 雍州의 땅이라고 하였으므로 곧 攜는 서경의 지명이다.’라고 주장하였다.(‘攜,地名,未詳所在。『新唐書』所載『大衍曆議』謂豐、岐、驪、攜皆鶉首之分,雍州之地,是攜即西京地名矣。’)

8) ‘立二十又一年’이라 한 것은 휴혜왕의 재위 햇수를 가리킨다. 『左傳正義』 昭公 26년 조에서는 『紀年』을 인용하여 휴혜왕 재위 21년 휴혜왕이 진나라 문공에게 살해되었고, 본디 적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휴왕(攜王)이라고 하였다고 설명하였다.(‘二十一年,攜王爲晉文公所殺。以本非適,故稱攜王。’) 재위 21년이라는 것이 『左傳正義』와 『繫年』에서 모두 일치한다. 진나라 문후가 여신을 죽여 두 왕이 병립하는 구도를 종결시켰으므로 『鄭語』에서 ‘진나라 문후가 이에 천자를 안정시켰다.’(‘晉文侯於是乎定天子。’)라고 한 것이다.

9) ‘周亡王九年’은 역대로 논쟁이 많은 구절이다. 李學勤 등은 『繫年』을 정리하면서 이 구절을 ‘주나라에 왕이 없게 된 지 9년’으로 해석하고 幽王이 죽은 지 9년이 되는 해 즉 기원전 762년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劉國忠이나 王暉 등은 이 구절이 攜惠王이 죽은 뒤 9년이 되는 해 즉 기원전 741년이라고 생각하였으며, 王紅亮 등 ‘亡王’을 ‘亡國之王’으로 이해하여 주나라를 멸망하게 한 幽王으로 보아 이 구절이 유왕 9년 즉 기원전 773년을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繫年』에 따르면, 평왕이 경사에서 옹립된 후 3년 후에 성주로 동천했으므로, 세 견해에서 동천 연대는 각각 기원전 759년, 738년, 770년이다. 세 견해 모두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심재훈, 「전래문헌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도전 - 淸華簡 『繫年』의 周 왕실 東遷」, 「역사학보」 221, 2014 참조.

10) 少鄂은 지명이며, 『左傳』 隱公 6년에 언급되는 진(晉)나라 땅 鄂, 곧 지금의 山西 鄕寧을 가리킨다. 한편, 심재훈(2014)은 少鄂이 南陽 인근의 鄂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1) 이 京師는 宗周, 곧 豐鎬 또는 鎬京이다. 『左傳正義』 昭公 26년 조에서는 『紀年』을 인용하여 ‘평왕이 西申으로 달아나 伯盤이 태자로 옹립되었고, 유왕과 함께 戲에서 죽었다. 이보다 먼저 申侯와 魯侯와 許文公이 평왕을 申에서 옹립하였기 때문에 본래의 태자는 天王이라 불렸다. 유왕이 죽고 虢公 翰이 또 왕자 余臣을 攜에서 옹립하였으니, 주나라에 두 왕이 병립하였다.’(‘平王奔西申,而立伯盤以爲大子,與幽王俱死於戲。先是申侯、魯侯及許文公立平王於申,以本大子,故稱天王。幽王旣死,而虢公翰又立王子余臣於攜,周二王並立。’)라고 하였는데, 『繫年』의 簡文과는 같지 않은 것이 있다.

12) 始啟의 啟는 『詩經』 「魯頌」 閟宮 편의 ‘너의 나라를 크게 넓힌다.’(‘大啟爾宇。’)라는 구절과 『左傳』 僖公 25년 전의 ‘晉이 이때부터 비로소 南陽으로 영토를 開拓하였다.’(‘晉於是始啓南陽。’)라는 구절에서 보이듯이 ‘개척하다, 확장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13) 정나라 武公은 주나라 宣王의 동생인 정나라 桓公의 아들이다. 『史記』 「鄭世家」에 의하면, 犬戎이 驪山의 아래에서 幽王과 桓公을 죽였는데, 정나라 사람들은 그 아들 掘突, 곧 武公을 옹립하였다고 한다.

14) 卽世는 세상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구절은 무공의 사망 이후 정나라의 왕위가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15) 『左傳』 桓公 11년과 「鄭世家」에 의하면, 莊公이 죽은 후에 그 아들 厲公이 한 번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繫年』의 簡文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장공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 특히 太子 忽, 公子 突, 公子 亹, 그리고 公子 嬰(혹은 儀)이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었기 때문에 당시 정나라는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장공이 죽은 후 태자 홀이 즉위하여 昭公이 되었지만, 宋 莊公이 개입하여 소공이 축출되어 위(衛)나라로 도망가고 공자 돌이 즉위하여 厲公이 되었다. 여공은 정권을 차지한 祭仲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채(蔡)나라로 달아나고 소공이 다시 즉위하였다. 소공은 복위에 성공하였지만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대부 高渠彌에게 시해당하게 된다. 고거미는 공자 미를 옹립하였는데, 齊 襄公이 首止 회합에서 공자 미와 고거미를 모두 죽였다. 이에 채중은 정나라 국내에서 공자 영(혹은 의)를 옹립하였다. 공자 영(혹은 의)는 비교적 정나라를 길게 통치했으나, 여공에게 투항한 傅瑕에게 시해당하게 되고 부하는 다시 여공을 옹립하게 된다. 여공이 다시 왕위에 오름으로써 장공의 아들들 사이에 일어난 왕위 계승 분쟁은 종결되게 된다. 이 복잡한 정나라 왕위 계승 분쟁은 『繫年』에서 아주 간략하게만 다루어진다.

16) 高之巨爾는 高渠彌이다. 之는 조사로, 선진시기에는 성과 이름 사이에 之를 넣는 용법이 있었다. 고거미가 정 소공을 시해한 일은 『左傳』 桓公 17년 조에 보인다. 한편, 釁壽는 『左傳』에는 公子 亹로 기록되어 있다. 釁과 亹는 성부가 같은 해성자이며, 亹는 眉로 읽는다. 『方言』에는 ‘眉는 老이다. 동제에서는 眉라고 한다.’(‘眉,老也,東齊曰眉。’)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爾雅』에는 ‘老는 壽이다.’(‘老,壽也。’)라고 하였으므로, 眉와 壽가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壽는 ‘오래 살다.’라는 의미이다. 王寧은 2014년 「“彔子聖”之名臆解」라는 글에서 子亹가 자이고 壽가 휘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선진 시대 사람들의 字의 형태는 ‘子某’이지 ‘子某某’가 아니며, ‘子釁壽’라는 표기가 簡文에 두 차례나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은 잘못 적힌 것이 아니라면 자와 휘를 연달아 쓴 것일 것이고, 옛 사람들은 자를 먼저 쓰고 휘를 썼기 때문에 ‘子釁壽’라는 표기를 통해 子釁 즉 子亹의 휘가 壽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7) 『左傳』과 『繫年』은 首止 회합에 대해 살짝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左傳』 桓公 18년 조에서는 子亹와 高渠彌가 首止 땅에 주둔한 齊 襄公을 만나러 갔다고 기록한 반면(‘秋,齊侯師于首止,子亹會之,高渠彌相。七月,戊戌,齊人殺子亹,而轘高渠彌。’), 『繫年』에서는 齊 襄公이 首止 땅에서 제후들과 회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左傳』의 같은 부분에서는 공자 미가 죽자 祭仲은 진(陳)나라에서 昭公의 동생 子儀(또는 子嬰)를 맞이하여 옹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祭仲逆鄭子于陳而立之。’), 簡文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 政은 ‘正’과 통한다. 또한 여기서 正은 定의 의미이다. 定은 정나라 공자들의 왕위 쟁탈전이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19) 漢陽은 漢水 동북부 지역이다. 『史記』 「楚世家」에서는 ‘초나라가 강해져 장강과 한수 사이의 소국들을 능멸히니, 소국들이 모두 초나라를 두려워했다.’(‘楚彊,陵江、漢閒小國,小國皆畏之。’)라고 하였고, 『左傳』 僖公 28년에서는 ‘漢陽의 여러 姬姓 국가들을 초나라가 실로 멸하였다.’(‘漢陽諸姬,楚實盡之。’)라고 하였다.


참고 문헌

저본)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

雷學淇, 『竹書紀年義證』, 저본에서 재인용

方詩銘, 王修齡, 『古本竹書紀年輯證』, 上海古籍出版社, 2005.

심재훈, 「전래문헌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도전 - 淸華簡 『繫年』의 周 왕실 東遷」, 『역사학보』 221, 2014.

王寧, "“彔子聖”之名臆解", 復旦大學出土文獻與古文字硏究中心, 2014년 6월 4일 수정, 2021년 9월 12일 접속, http://www.gwz.fudan.edu.cn/Web/Show/2281#_ed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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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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