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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繫年』 3장은 13호간부터 16호간까지 총 4개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감의 난과 진(秦)의 기원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참고 문헌을 토대로 고문자를 예정하고 통가자의 경우 본자를 밝힌 것입니다.
위 이미지를 토대로 표점을 달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깨지는 글자가 하나 있는데 대괄호 안에 묶어 표시했습니다.
周武王旣克殷,乃設三監于殷1)。武王陟2),商邑興反3),殺三監而立祿子耿4)。成王屎伐商邑5),殺祿子耿6),飛廉東逃于商蓋氏7),成王伐商蓋8),殺飛廉9),西遷商蓋之民于邾吾10),以御奴[⿱虘又]之戎,是秦先人11),世作周仚12)。周室旣卑13),平王東遷,止于成周,秦仲焉東居周地14),以守周之墳墓,秦以始大。
주 무왕이 이미 은나라를 정복한 다음에 은에 삼감을 설치했다. 무왕이 돌아가시자, 상읍이 반란을 일으켜 삼감을 죽이고 녹자 경을 세웠다. 성왕이 계속해서 상읍을 정벌하여 녹자 경을 죽이니, 비렴이 동쪽 상개씨의 땅으로 도망가고, 성왕은 상개 땅을 정벌하여 비렴을 죽이고, 상개의 백성들을 서쪽 주어 땅으로 옮겨 노차지융을 제거하도록 하니, 이들이 진나라의 선조이며, 대대로 주나라의 호위가 되었다. 주나라 왕실이 이미 쇠미해진 후에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성주에 이르자, 진중은 이때 동쪽으로 가 주나라 땅에 거하면서 주나라의 분묘를 지켰으니, 진나라가 이에 강대해졌다.
1) 『逸周書』 「作雒」에 ‘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하고, 왕자 녹보를 세워 상나라의 제사를 지키게 하였다. 管叔을 동쪽에 세우고, 蔡叔과 霍叔을 은나라에 세워 은나라의 신하를 감시하도록 하였다(武王克殷,乃立王子祿父,俾守商祀。建管叔于東,建蔡叔、霍叔于殷,俾監殷臣。).’라는 기록이 있다. 단지 三監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을 뿐이며, 三監이라는 말은 전래문헌 중 『尙書大傳』에서 처음 나온다. 삼감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은 『漢書』 「地理志」와 鄭玄의 『詩譜』이다. 『漢書』 「地理志」에는 ‘주나라가 은을 이미 멸한 다음에 그 기내(畿內)를 나누어 세 나라로 만들었는데, 『詩經』 風의 邶國, 庸國, 衛國이 이것이다. 패국에는 주왕의 아들 무경을 봉했고, 용국은 관숙이 다스렸고, 위국은 채숙이 다스렸는데, 은나라 백성을 감시하였는데, 그들을 일러 삼감이라 한다(周旣滅殷,分其畿內爲三國,詩風邶、庸、衛國是也。鄁(邶),以封紂子武庚;庸,管叔尹之;衛,蔡叔尹之:以監殷民,謂之三監。).’라는 기록이 있는데, 정현은 『시보』에서 관숙, 채숙, 곽숙이 패국, 용국, 위국을 나누어 다스렸다고 말하고 있어 두 설이 같지 않다.
2) 『韓昌黎集』에 실려 있는 「黃陵廟碑」에 ‘『죽서기년』에는 제왕의 죽음을 모두 “陟”이라고 했다(『竹書紀年』帝王之沒皆曰“陟”。).’이라는 문장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陟은 '돌아가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3) 『爾雅』 「釋言」에 ‘謖,興,起也。’라고 하였으므로, 興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풀 수 있다.
4) 상읍이 반란을 일으켜 三監을 죽였다는 것은 기존의 여러 전래문헌과 상충되는 내용이다. 이에 정리자는 ‘殺三監’을 三監의 주나라 이졸(吏卒)을 죽인 것으로 해석한다. 祿字耿은 大保簋(集成 4140)의 명문에 나오는 彔子𦔻이다.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는 『金文通釋』 卷一上에서 彔子𦔻이 紂王의 아들 武庚祿父라는 것을 이미 지적했는데, 시라카와의 설은 『繫年』의 출토를 통해 증명되었다.
5) 屎는 陳侯因[⿱次月]敦(集成 4649)에 나오는데, 곧 『설문해자』에 실린 ‘敉’자의 혹체(或體) ‘侎’이다. 고문자에서 편방 尸는 매우 자주 편방 人과 통용되기 때문이다. 容庚은 『善齋彝器圖錄』에서 이 글자의 뜻이 ‘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簡文은 성왕이 무왕의 뒤를 이어 재차 상을 정벌하였다는 뜻이다. 陳侯因[⿱次月]敦의 屎자는 다음과 같다.
6) 『史記』 「周本紀」에서는 ‘주옥이 성왕의 명을 받들어 무경, 관숙을 토벌하여 주살하였고 채숙을 추방하였다(周公奉成王命,伐誅武庚、管叔,放蔡叔。).’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魯世家」에서도 ‘마침내 관숙을 주살하고, 무경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하였다(遂誅管叔,殺武庚,放蔡叔。).’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逸周書』 「作雒」에는 ‘왕자 녹보는 북으로 달아났고, 관숙은 목 졸려 죽었으며, 채숙을 곽릉에 가두었다(王子祿父北奔,管叔經而卒,乃囚蔡叔于郭淩。).’라고 기록되어 있다.
7) 飛𤯍은 飛廉이다. 𤯍은 廉과 마찬가지로 談部 글자이다. 『史記』 「秦本紀」에는 蜚廉으로 되어 있다. 嬴姓이며, 진(秦)나라 사람들의 시조라고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中潏이며, 서융(西戎) 지역에 살면서 서수(西垂)를 지켰다고 한다. 비렴은 惡來를 낳았는데, 惡來는 힘이 세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여 부자가 모두 재주와 힘으로 은주(殷紂)를 섬겼다고 한다.
商蓋는 『墨子』 「耕柱」, 『韓非子』 「說林 上」에 보이는데, 곧 商奄이다. 『春秋左傳』 정공(定公) 4년에는 ‘상엄의 백성을 그대로 소유하게 하였다(因商奄之民。).’라고 하였다. 『括地志』에는 ‘곡부현 엄리가 곧 엄나라의 땅이다(曲阜縣奄里卽奄國之地也。).’라고 하였으며, 『尙書大傳』에서는 ‘엄군과 포고가 녹보에게 말하기를, “무왕은 이미 죽었고, 성왕은 아직 유약하며, 주공은 의심받고 있으니, 이는 백 세의 때입니다. 거사를 일으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녹보와 삼감이 반란을 일으켰다(奄君、薄姑謂祿父曰:“武王旣死矣,成王尚幼矣,周公見疑矣,此百世之時也,請舉事。”然後祿父及三監叛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8) 『尙書』 「蔡仲之命」의 序에 이르기를, ‘성왕이 동으로 회이를 정벌하고 마침내 엄을 정복하고서 “성왕정”을 지었다. 성왕이 엄을 정복한 후에, 그 임금을 포고로 옮기려고 하니, 주공이 소공에게 고하여 “장포고”를 짓게 하였다(成王東伐淮夷,遂踐奄,作《成王政》。成王旣踐奄,將遷其君於蒲姑,周公告召公,作《將蒲姑》。).’라고 하였다.
9) 『孟子』 「滕文公下」에는 ‘주공이 무왕을 도와 주왕을 주살하고 엄을 정벌한 지 삼 년 만에 그 군주를 토벌하고, 비렴을 바다 모퉁이로 몰아 죽였다. 멸망시킨 나라가 50개국이었고,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를 몰아내어 멀리 쫓아내자, 천하가 크게 기뻐하였다(周公相武王,誅紂,伐奄,三年討其君,驅飛廉於海隅而戮之。滅國者五十,驅虎、豹、犀、象而遠之,天下大悅。)’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秦本紀」에는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오래도 함께 죽었다. 이 때 비렴은 주왕을 위해 북방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보고할 곳이 없자, 곽태산에 단을 만들어 보고하였다. (비렴이) 죽자 곽태산에 장사지냈다.(周武王之伐紂,并殺惡來。是時蜚廉爲紂石(使)北方,還,無所報,爲壇霍太山而報……死,遂葬於霍太山。).’라고 기록되어 있다.
10) [⿸虍𡈼]은 초나라 문자에서 항상 吾로 읽는다. 邾吾는 곧 『尙書』 「禹貢」에 나오는 雍州의 ‘西傾、朱圉、鳥鼠至于太華。’의 주어(朱圉)이다. 『漢書』 「地理志」에서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의 주어(朱圉)에는 ‘「우공」의 주어산이 현 남쪽 오중취에 있다(《禹貢》朱圄山在縣南梧中聚。).’라고 기록되어 있다. 『水經注』 「渭水經」에도 주어산이 오중취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竝南出朱圉山,山在梧中聚。).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감곡현(甘谷縣) 서남쪽이다.
11)[⿱虘又]는 우선 차로 읽는다. 虘가 성부이고 又가 형부인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노차지융이 무슨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秦은 중원 기원의 여러 나라와 달리 문화적으로나 혈연적으로 이질적인 점이 많았기 때문에 그 기원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이른바 ‘동래설(東來說)’과 ‘서래설(西來說)’ 간의 논쟁이다. 왕국유(王國維)는 『史記』와 같은 전래문헌에 근거하여, 秦의 도읍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츰 옮겨과는 과정을 근거로 하여 秦이 서쪽에서 기원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서래설’을 주장하였다. 이 설은 秦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력한 설이 되었다. ‘서래설’에 대해, 秦을 중국 속에서 이해하기 위하여 秦의 기원을 동방에서 찾으려고 하는 학자들 또한 있었다. 徐旭生과 같은 학자는 商과 秦 모두 玄鳥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少皞를 제사 지냈고, ‘주가 삼감의 난을 진압한 뒤 이들을 회하(淮河) 및 섬서(陝西) 지역으로 이주시켰다.’라는 『逸周書』의 기록을 들며, 秦의 조상을 東夷 집단이라고 주장하였는데, 顧頡剛, 錢穆, 林劍鳴 등의 학자가 이를 따랐다. 그렇지만 『史記』 「진본기」에는 ‘동래설’을 반박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史記』에 근거하여 ‘서래설’을 견지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80년대 이후로는 고고학 자료를 사용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결정적인 근거가 부족하여 논의는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2011년 『繫年』의 발표로 인해 ‘동래설’이 주류 학설이 되었다. 이학근(李學勤)은 『繫年』 제3장의 내용을 통해 ‘동래설’과 ‘서래설’ 간의 논쟁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동쪽 상엄(商奄)의 백성들을 현재의 감숙성 감곡(甘谷) 모가평(毛家坪) 유지의 주어(朱圉)로 옮겼는데, 이들이 秦의 선조가 되므로 진의 ‘동래설’이 옳다는 것이다.
마왕퇴(馬王堆)에서 나온 漢墓 帛書 중 『戰國縱橫家書』 「蘇秦謂燕王」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스로 회복하고 만족한다면, 초나라는 저수와 장수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진나라는 상엄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自復而足,楚將不出雎(沮)章(漳),秦將不出商閹(奄)……).’ 한편 이 기록은 『戰國策』 「燕策一」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以自憂爲足,則秦不出殽塞,齊不出營丘,楚不出疏章。’로 되어 있다. 商閹이 殽塞로 바뀌어 있다.
12) 학자에 따라서 [⿱弓山]으로 석문하기도 하고, 小寺 같은 경우는 危로 예정하고 衛로 읽기도 한다. 정리자에 따르면, 从尸从山 글자인데, 고문자에서 편방 尸는 매우 자주 편방 人과 통용되므로 정리자는 『說文解字』의 仚으로 예정하였다. 仚는 曉母元部 글자인데, 정리자는 여기에서는 匣母元部 글자인 扞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扞은 『左傳』 桓公 12년 杜預의 주석에 ‘지키는 것이다(衛也。).’라고 풀이되어 있다.
13) 『國語』 「晉語八」에 나오는 ‘지금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졌다(今周室少卑。).’라는 구절에 대해 韋昭는 ‘卑는 미약해지는 것이다(卑,微也。).’라고 풀이하였다.
14) 秦仲은 진(秦) 양공(襄公)이다. 「秦本紀」에 따르면, 진중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그중 장남은 장공(莊公)이었고, 장공은 서견구(西犬丘)에서 살면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은 세보(世父)였다. 주 선왕이 즉위할 때 진중을 대부로 삼아 서융을 토벌한 일이 있었는데 서융이 진중을 죽였다. 이에 세보는 “융이 나의 할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융의 왕을 죽이지 않으면 봉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아우 양공에게 자리를 양보하였으니, 양공이 태자가 되어 즉위하게 되었다.
참고 문헌
저본)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
김병준, 「청화간(淸華簡) <계년>(繫年)의 비판적 검토— 진(秦)의 기원과 관련하여」, 『인문논총』 제73권 제3호, 2016
白川靜, 「金文通釋 卷一上」, 『白鶴美術館雜誌』 第二輯三, 1962
李裕杓, 「西周 金文에 보이는 ‘秦夷’와 『繫年』의 ‘商奄之民’」, 『동양사학연구』 135, 2016.
李學勤, 「清華簡≪繫年≫及有關古史問題」 , 『文物』 2011-3, 2011. 김병준(2016)에서 재인용.
李學勤, 「談秦人初居“邾吾”的地理位置」 , 『出土文獻』 2, 2011. 김병준(2016)에서 재인용.
黃留珠, 「秦文化二源說」 , 『西北大學學報』 1995-3,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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