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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2.02 :: 학이03. 교언영색
  2. 2020.02.02 :: 학이02. 군자는 근본을 힘쓴다.
  3. 2020.02.02 :: 학이01. 군자의 조건
  4. 2020.01.05 :: 처소격
  5. 2020.01.05 :: 이규보-주뢰설(舟賂說)
  6. 2020.01.05 :: 이규보-경설(鏡說)
한문학/논어집주 2020. 2. 2. 18:50

3. 子曰 巧言令色이 鮮矣仁이니라

공자가 말했다.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아름답게 꾸미는 사람치고 인한 사람이 적다."

巧는 好요 令은 善也라 好其言하고 善其色하여 致飾於外하여 務以悅人이면 則人欲肆而本心之德이 亡矣라 聖人이 辭不迫切하여 專言鮮이면 則絶無를 可知니 學者所當深戒也니라
巧는 아름다움이고, 令은 잘함(좋게 함)이다. 그 말을 아름답게(듣기 좋게) 하고, 그 얼굴빛을 좋게 하여 밖으로 꾸미기를 지극히 해서 사람을 기쁘게 함에 힘쓰면 인욕이 멋대로 퍼져서 본심의 덕이 없어진다. 성인은 말을 인정이 없게 하지 않아서 단지 말하기를 드물다고만 했으니 <인한 사람이> 절대로 없음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깊게 경계해야 할 바이다. 

○程子曰 知巧言令色之非仁이면 則知仁矣리라
정자가 말했다. "교언영색이 인이 아님을 알면 인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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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취상
:
한문학/논어집주 2020. 2. 2. 17:54

2-1. 有子曰 其爲人也 孝弟요 而好犯上者 鮮矣니 不好犯上이요 而好作亂者 未之有也니라

유자가 말했다.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경하면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드무니,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는 있지 않다.

弟(悌) : 공경할 제

有子는 孔子弟子니 名若이라 善事父母爲孝요 善事兄長爲弟라 犯上은 謂干犯在上之人이라 鮮은 少也라 作亂은 則爲悖逆爭鬪之事矣라 此는 言人能孝弟면 則其心和順하여 少好犯上이니 必不好作亂也라
子는 공자의 제자이니 이름은 若이다. 부모 섬기기를 잘 하는 것이 효이고, 형과 어른을 섬기기를 잘 하는 것이 제이다. 犯上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범하는 것을 이른다. 鮮은 적은 것이다. 作亂은 곧 패역하여 다투고 싸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능히 효와 제를 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이 화순해서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으니, 반드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2-2. 君子는 이니 生하나니 者는 與인저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이루어지면 도가 생긴다. 효와 제는 아마도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

與(歟) : 감탄사 여

務는 專力也요 本은 猶根也라 仁者는 愛之理요 心之德也라 爲仁은 猶曰行仁이라 與者는 疑辭니 謙退하여 不敢質言也라 言君子凡事를 專用力於根本이니 根本旣立이면 則其道自生이라 若上文所謂孝弟는 乃是爲仁之本이니 學者務此면 則仁道自此而生也니라 
務는 힘을 오직 한 곳에 쓰는 것이며 本은 根과 같다. 仁은 사랑의 이치이고 마음의 덕이다. 爲仁은 行仁이라는 말과 같다. 與는 의심하는 말이니 겸손히 물러나서 감히 말을 단언하지 않는 것이다. 군자는 범사를 오로지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이미 이루어졌으면 그 도가 자연스럽게 생기며, 만약 윗글에서 말한 바 효와 제는 곧 이 인을 행하는 근본이니 배우는 사람이 이것을 힘쓰면 인의 도가 이로부터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程子曰 孝弟는 順德也라 故로 不好犯上이니 豈復有逆理亂常之事리오 德有本하니 本立則其道充大라 孝弟行於家而後에 仁愛及於物이니 所謂親親而仁民也라 故로 爲仁은 以孝弟爲本이요 論性則以仁爲孝弟之本이니라
정자가 말했다. "효와 제는 순한 덕이다. 그러므로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어찌 다시 이치를 거스르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덕에는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서면 그 도가 크게 채워진다. 집안에서 효와 제를 행한 이후에 인과 애가 외물에까지 미치니 이른바 가까운 사람을 친히 여기고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을 행할 때에는 효와 제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고, 성품을 논할 때에는 인으로써 효와 제의 근본을 삼는 것이다."

或問 孝弟爲仁之本이라하니 此是由孝弟면 可以至仁否아 曰 非也라 謂行仁自孝弟始라 孝弟는 是仁之一事니 謂之行仁之本則可커니와 謂是仁之本則不可라 蓋仁은 是性也요 孝弟는 是用也라 性中에 只有箇仁義禮智四者而已니 曷嘗有孝弟來리오 然이나 仁主於愛하고 愛莫大於愛親이라 故로 曰 孝弟也者는 其爲仁之本與인저
혹자가 물었다. "효와 제가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하니 이에 효와 제로 말미암아서 인에 이를 수 있습니까?" <정자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인을 행함이 효와 제로부터 시작함을 말한 것이다. 효와 제는 이 인의 한 가지 일이니 그것이 인을 행함의 근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것이 인의 근본이라고 말한다면 불가하다. 대개 인은 이 성품이고 효와 제는 이 쓰임이다. 성품 안에 단지 인, 의, 예, 지 네 가지 것이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효와 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인은 사랑을 주장하고, 사랑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효와 제는 아마도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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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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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논어집주 2020. 2. 2. 15:34
此는 爲書之首篇이라 故로 所記多務本之意하니 乃入道之門이요 積德之基니 學者之先務也라 凡十六章이라
이것은 책의 머리편이 된다. 그러므로 기록한 바가 근본에 힘쓰는 뜻이 많으니 곧 도에 들어가는 문이요 덕을 쌓는 기본이니 배우는 사람이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모두 16장이다.

1-1.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공자가 말했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說 : 기쁠 열

學之爲言은 效也라 人性皆善이나 而覺有先後하니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라야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라 習은 鳥數飛也니 學之不已를 如鳥數飛也라 說은 喜意也니 旣學而又時時習之면 則所學者熟而中心喜說하여 其進이 自不能已矣리라
'學'이라고 말한 것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성품은 모두 선하나 깨닫는 데에는 선후가 있으니 나중에 깨닫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하는 바를 본받아야 선을 밝히고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다. '習'은 새가 자주 날갯짓하는 것이다. 배우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마치 새가 자주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 '說'은 기쁘다는 뜻이니 이미 배우고 또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배운 것이 숙달되어서 중심에 기쁨을 느껴서 그 진전이 스스로 그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數 : 자주 삭

程子曰 習은 重習也니 時復思繹하여 浹洽於中이면 則說也니라 
정자가 말했다. "'習'은 거듭하는 것이니, 때때로 다시 생각하여 연역하여 마음속에 흡족하게 젖어들면 기뻐진다."
繹 : 끌어낼 역

又曰 學者는 將以行之也니 時習之면 則所學者在我라 故로 悅이니라 
또 말했다. "배우는 것은 장차 그것을 행하려고 해서이니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배운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뻐지는 것이다."

謝氏曰 時習者는 無時而不習이니 坐如尸는 坐時習也요 立如齊는 立時習也니라
사씨가 말했다. "때때로 배우는 것은 때마다 익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앉아서는 시동(尸童)과 같이 함은 앉아서 때때로 배우는 것이고, 서서는 재계(齊戒)할 때와 같이 함은 서서 때때로 배우는 것이다."

1-2.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벗이 있어 먼 곳에서부터 찾아오면 즐겁지 않겠는가.

朋은 同類也니 自遠方來면 則近者可知니라
'朋'은 같은 부류이니 먼 곳으로부터 오면 가까운 사람들이 <찾아옴을> 알 수 있다.

程子曰 以善及人하여 而信從者衆이라 故로 可樂이니라
정자가 말했다. "선을 사람에 미쳐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즐거울 수 있다."

 又曰 說은 在心하고 樂은 主發散이니 在外니라
또 말했다. "說은 마음 속에 있고 樂은 발산함을 위주로 하니 밖에 있는 것이다."

1-3.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慍 : 성낼 온

慍은 含怒意라 君子는 成德之名이라
'慍'은 노여움을 머금는다는 뜻이다. 군자는 덕을 이룬 사람의 이름이다.

尹氏曰 學은 在己하고 知不知는 在人하니 何慍之有리오 
윤씨가 말했다. "배움은 자기에게 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은 남에게 있으니 어찌 성냄이 있을 수 있겠는가."

程子曰 雖樂於及人이나 不見是而無悶이라야 乃所謂君子니라 
정자가 말했다. "비록 <선을> 남에게 미침을 즐거워하나 <남에게> 옳다 여김을 받지 못해도 서운함이 없어야 비로소 군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悶 : 답답할 민

愚謂 及人而樂者는 順而易하고 不知而不慍者는 逆而難이라 故로 惟成德者能之라 然이나 德之所以成은 亦由學之正, 習之熟, 說之深而不已焉耳니라
내가 생각하건대 남에게 미쳐서 즐거운 것은 순리에 따르니 쉽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 것은 순리에 거르르니 어렵다. 그러므로 오직 덕을 이룬 사람이어야 그것을 능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덕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또한 배움을 올바르게 하고, 익히기를 익숙히 하고, 기뻐하기를 깊이 하여 그치지 아니함에 말미암을 뿐이다. 
愚謂 : '어리석은 내가 생각하건대'라는 뜻. 주자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겸사(謙辭)로 쓴 것이다. 

○程子曰 樂은 由說而後得이니 非樂이면 不足以語君子니라
정자가 말했다. "즐거움은 기쁨으로 말미암은 이후에 얻어지는 것이니 즐거움이 아니면 군자라고 말하기에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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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취상
:
라틴어/문법 2020. 1. 5. 13:43

처소격(처격, 장소격, 제7격)은 처소, 시간적이나 공간적 범위, 지향점 따위를 나타내는 격으로써, '-에서'라는 뜻을 가진다. 라틴어에서는 domus(집), rūs(시골), humus(땅), focus(난로), militia(군대)의 다섯 개의 일반명사와 도시, 작은 섬의 이름만 처격을 가진다. 라틴어에서 처격은 불안정하여 독립된 격으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격 어미가 차이가 있다.

명사의 분류

고대 라틴어

고전 라틴어

비고

제1곡용 명사

-āi

-ae

여격과 속격에 합류

제2곡용 명사

-ei

속격에 합류

제3곡용 명사

-ei, -e

-ī, -e

원래 대격과 같았지만, 탈격으로 대체

따라서 고전 라틴어에서, domus는 처격에서 domī가 되고, rūs는 처격에서 rūrī가 되고, humus는 처격에서 humī가 되고, militia는 처격에서 militiae가 되고, focus는 처격에서 focī가 된다.

제1곡용 명사의 처격은 다른 곡용 명사의 처격보다 훨씬 보편적이는데, 로마의 많은 장소 이름들이 제1곡용 명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Rōma는 Rōmae라는 속격, 여격과 같은 형태를 사용하고, 마찬가지로 Hibernia는 Hiberniae를 사용한다. Athēnae와 Cūmae 같은 소수의 장소이름은 그것이 단일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복수였는데, 이러한 복수 이름들은 또한 여격, 탈격과 같은 형태를 사용했다. 따라서 Athēnae는 Athēnis가 되고, Cūmae는 Cūmis가 된다. 또한 많은 수의 처소격을 가지는 제2곡용 명사 이름들, 예를 들어 처소격이 Brundisiī인 Brundisium, 처소격이 Eborācī인 Eborācum이 있었다.

처소격은 다수의 장소에 위치한 것을 표현할 수 없다. Athēnae와 같은 특정 고유 명사는 원래부터 복수 형태였기 때문에 복수 형태가 존재하는 것뿐이다. ‘그가 집에 있다’는 처소격을 사용하여 ‘(is) domi est’로 표현될 수 있지만, ‘그들이 그들의 (개별적이고 분리된) 집에 있다’는 처소격으로 표현될 수 없다.

posted by 취상
:
한문학/한문학 2020. 1. 5. 13:41

李子南渡一江、有與方舟而濟者、兩舟之大小同、榜人之多少均、人馬之衆寡幾相類、而俄見其舟離去如飛、已泊彼岸、予舟猶邅廻不進。問其所以、則舟中人曰:″彼有酒以飮榜人、榜人極力蕩槳故爾。″ 予不能無愧色、因歎息曰:″嗟乎!此區區一葦所如之間、猶以賂之之有無、其進也有疾徐先後、況宦海競渡中?顧吾手無金、宜乎至今未霑一命也。″ 書以爲異日觀。

이자(이규보)가 남쪽으로 한 강을 건너는데, 다른 쪽에도 배를 타고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 두 배의 크기가 같고, 사공의 수도 같았으며, 사람과 말의 수도 서로 비슷하였다. 내가 보니 그 배는 나는 것 같이 떠나가서 이미 하안에 정박하였는데, 내 배는 아직도 제자리에서 빙빙 돌 뿐 나아가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배에 있는 사람이 말하길, “저 배에는 술이 있어서 사공이 마셨으니(저 배는 술을 사공에게 주어 마시게 했으니), 사공이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아, 이 조그마한 한 척 나룻배가 나아가는 중에도, 오히려 뇌물이 오고 가는 것에 따라 그 나아감에 질서(疾徐)와 선후(先後)가 있으니 하물며 벼슬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경쟁에 있어서랴? 나를 돌아보매 손에 돈이 없으니, 지금까지 작은 벼슬 하나도 없지 못한 것이 당연하구나.”라고 하였다. 글로 써서 다른 날에 보려고 한다.

이 글은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피력한 '경설'보다는 앞서 쓰인 것 같다. 저자 이규보가 자신이 벼슬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이 글에서 벼슬을 하는 것을 배로 바다를 건너는 것에 비유하면서 자신이 벼슬이 없는 이유를 깨닫는다. 두 배의 속성이 모두 같은데 한 배는 가만히 돌고 있고 한 배는 이미 건너갔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바로 술이었다. 건너간 배는 사공에게 술을 주었던 것이다. 이규보는 이를 보고 자신이 뇌물로 줄 돈이 없어서 벼슬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한다. 요즈음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부정청탁, 채용비리 등으로 조건이 똑같은데 한 사람은 붙고 한 사람은 떨어진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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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경설(鏡說)  (0) 2020.01.05
posted by 취상
:
한문학/한문학 2020. 1. 5. 13:35

居士有鏡一枚. 塵埃侵蝕掩掩, 如月之翳雲. 然朝夕覽觀, 似若飾容貌者. 客見而問曰: "鏡所以鑑形, 不則君子對之, 以取其淸. 今吾子之鏡, 濛如霧如, 旣不可鑑其形, 又無所取其淸. 然吾子尙炤不已, 豈有理乎." 居士曰: "鏡之明也, 妍者喜之, 醜者忌之. 然妍者少, 醜者多, 若一見, 必破碎後已, 不若爲塵所昏. 塵之昏, 寧蝕其外, 未喪其淸. 萬一遇妍者而後, 磨拭之, 亦未晚也. 噫! 古之對鏡, 所以取其淸, 吾之對鏡, 所以取其昏, 子何怪哉." 客無以對.

거사는 거울 한 장을 가지고 있었다. 먼지가 점점 끼니, 흐릿하니 꼭 달이 구름에 가린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마치 용모를 꾸미는 자같이 하였다. 손님이 보고서 묻기를, “거울이라는 것은 형체를 비추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군자는 그것을 대하여 그 맑음을 취합니다. 지금 당신의 거울은, 흐릿하여 부슬비가 내린 듯하니, 그 형체를 비출 수 없고, 또한 그 맑음을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비추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다. 거사가 대답하기를, “거울이 맑으면, 예쁜 사람은 기뻐하나 못생긴 사람은 꺼려합니다. 그런데 예쁜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으니, 못생긴 사람이 한 번 보면, 반드시 깨뜨려 버리고 말 것이니, 먼지로 흐릿해지는 것만 못합니다. 먼지의 흐릿함은, 겉을 흐리게 할지언정 그 맑음을 잃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예쁜 사람을 만난다면, 그 후에 그것을 닦아도 늦지 않습니다. 아아, 옛날에 거울을 대한 것은 그 맑음을 취하는 까닭이고, 내가 거울을 대하는 것은 그 흐릿함을 취하는 까닭이니, 당신은 무엇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규보는 '경설'에서 부정적 현실을 받아들일지언정 사람의 맑은 본질은 흐려지지 않는다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제시한다. 바로 현실주의적 세계관인 것이다.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성인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추이해야 한다는 어부의 세계관이 생각난다. 무신의 난 이후 이규보의 정치 행보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이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규보는 무신의 난 이후 최씨 정권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으며 입신한다. 이 글은 이규보가 불의한 최씨 정권에서 벼슬하는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는 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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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취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