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繫年』 역주 2021. 11. 6. 14:49

본 게시글의 이미지나 석문, 번역 또는 주석을 다른 곳에 활용하실 경우에는 출처(닉네임, 블로그 이름, URL 링크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를 밝혀주세요.

『繫年』 3장은 13호간부터 16호간까지 총 4개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감의 난과 진(秦)의 기원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확대한 13호간, 14호간, 15호간, 16호간

아래 이미지는 참고 문헌을 토대로 고문자를 예정하고 통가자의 경우 본자를 밝힌 것입니다.

위 이미지를 토대로 표점을 달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깨지는 글자가 하나 있는데 대괄호 안에 묶어 표시했습니다.

周武王旣克殷,乃設三監于殷1)。武王陟2),商邑興反3),殺三監而立祿子耿4)。成王屎伐商邑5),殺祿子耿6),飛廉東逃于商蓋氏7),成王伐商蓋8),殺飛廉9),西遷商蓋之民于邾吾10),以御奴[⿱虘又]之戎,是秦先人11),世作周仚12)。周室旣卑13),平王東遷,止于成周,秦仲焉東居周地14),以守周之墳墓,秦以始大。


주 무왕이 이미 은나라를 정복한 다음에 은에 삼감을 설치했다. 무왕이 돌아가시자, 상읍이 반란을 일으켜 삼감을 죽이고 녹자 경을 세웠다. 성왕이 계속해서 상읍을 정벌하여 녹자 경을 죽이니, 비렴이 동쪽 상개씨의 땅으로 도망가고, 성왕은 상개 땅을 정벌하여 비렴을 죽이고, 상개의 백성들을 서쪽 주어 땅으로 옮겨 노차지융을 제거하도록 하니, 이들이 진나라의 선조이며, 대대로 주나라의 호위가 되었다. 주나라 왕실이 이미 쇠미해진 후에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성주에 이르자, 진중은 이때 동쪽으로 가 주나라 땅에 거하면서 주나라의 분묘를 지켰으니, 진나라가 이에 강대해졌다.


1) 『逸周書』 「作雒」에 ‘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하고, 왕자 녹보를 세워 상나라의 제사를 지키게 하였다. 管叔을 동쪽에 세우고, 蔡叔과 霍叔을 은나라에 세워 은나라의 신하를 감시하도록 하였다(武王克殷,乃立王子祿父,俾守商祀。建管叔于東,建蔡叔、霍叔于殷,俾監殷臣。).’라는 기록이 있다. 단지 三監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을 뿐이며, 三監이라는 말은 전래문헌 중 『尙書大傳』에서 처음 나온다. 삼감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은 『漢書』 「地理志」와 鄭玄의 『詩譜』이다. 『漢書』 「地理志」에는 ‘주나라가 은을 이미 멸한 다음에 그 기내(畿內)를 나누어 세 나라로 만들었는데, 『詩經』 風의 邶國, 庸國, 衛國이 이것이다. 패국에는 주왕의 아들 무경을 봉했고, 용국은 관숙이 다스렸고, 위국은 채숙이 다스렸는데, 은나라 백성을 감시하였는데, 그들을 일러 삼감이라 한다(周旣滅殷,分其畿內爲三國,詩風邶、庸、衛國是也。鄁(邶),以封紂子武庚;庸,管叔尹之;衛,蔡叔尹之:以監殷民,謂之三監。).’라는 기록이 있는데, 정현은 『시보』에서 관숙, 채숙, 곽숙이 패국, 용국, 위국을 나누어 다스렸다고 말하고 있어 두 설이 같지 않다.


2) 『韓昌黎集』에 실려 있는 「黃陵廟碑」에 ‘『죽서기년』에는 제왕의 죽음을 모두 “陟”이라고 했다(『竹書紀年』帝王之沒皆曰“陟”。).’이라는 문장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陟은 '돌아가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3) 『爾雅』 「釋言」에 ‘謖,興,起也。’라고 하였으므로, 興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풀 수 있다.


4) 상읍이 반란을 일으켜 三監을 죽였다는 것은 기존의 여러 전래문헌과 상충되는 내용이다. 이에 정리자는 ‘殺三監’을 三監의 주나라 이졸(吏卒)을 죽인 것으로 해석한다. 祿字耿은 大保簋(集成 4140)의 명문에 나오는 彔子𦔻이다.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는 『金文通釋』 卷一上에서 彔子𦔻이 紂王의 아들 武庚祿父라는 것을 이미 지적했는데, 시라카와의 설은 『繫年』의 출토를 통해 증명되었다.


5) 屎는 陳侯因[⿱次月]敦(集成 4649)에 나오는데, 곧 『설문해자』에 실린 ‘敉’자의 혹체(或體) ‘侎’이다. 고문자에서 편방 尸는 매우 자주 편방 人과 통용되기 때문이다. 容庚은 『善齋彝器圖錄』에서 이 글자의 뜻이 ‘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簡文은 성왕이 무왕의 뒤를 이어 재차 상을 정벌하였다는 뜻이다. 陳侯因[⿱次月]敦의 屎자는 다음과 같다.

 

6) 『史記』 「周本紀」에서는 ‘주옥이 성왕의 명을 받들어 무경, 관숙을 토벌하여 주살하였고 채숙을 추방하였다(周公奉成王命,伐誅武庚、管叔,放蔡叔。).’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魯世家」에서도 ‘마침내 관숙을 주살하고, 무경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하였다(遂誅管叔,殺武庚,放蔡叔。).’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逸周書』 「作雒」에는 ‘왕자 녹보는 북으로 달아났고, 관숙은 목 졸려 죽었으며, 채숙을 곽릉에 가두었다(王子祿父北奔,管叔經而卒,乃囚蔡叔于郭淩。).’라고 기록되어 있다.

7) 飛𤯍은 飛廉이다. 𤯍은 廉과 마찬가지로 談部 글자이다. 『史記』 「秦本紀」에는 蜚廉으로 되어 있다. 嬴姓이며, 진(秦)나라 사람들의 시조라고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中潏이며, 서융(西戎) 지역에 살면서 서수(西垂)를 지켰다고 한다. 비렴은 惡來를 낳았는데, 惡來는 힘이 세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여 부자가 모두 재주와 힘으로 은주(殷紂)를 섬겼다고 한다.
商蓋는 『墨子』 「耕柱」, 『韓非子』 「說林 上」에 보이는데, 곧 商奄이다. 『春秋左傳』 정공(定公) 4년에는 ‘상엄의 백성을 그대로 소유하게 하였다(因商奄之民。).’라고 하였다. 『括地志』에는 ‘곡부현 엄리가 곧 엄나라의 땅이다(曲阜縣奄里卽奄國之地也。).’라고 하였으며, 『尙書大傳』에서는 ‘엄군과 포고가 녹보에게 말하기를, “무왕은 이미 죽었고, 성왕은 아직 유약하며, 주공은 의심받고 있으니, 이는 백 세의 때입니다. 거사를 일으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녹보와 삼감이 반란을 일으켰다(奄君、薄姑謂祿父曰:“武王旣死矣,成王尚幼矣,周公見疑矣,此百世之時也,請舉事。”然後祿父及三監叛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8) 『尙書』 「蔡仲之命」의 序에 이르기를, ‘성왕이 동으로 회이를 정벌하고 마침내 엄을 정복하고서 “성왕정”을 지었다. 성왕이 엄을 정복한 후에, 그 임금을 포고로 옮기려고 하니, 주공이 소공에게 고하여 “장포고”를 짓게 하였다(成王東伐淮夷,遂踐奄,作《成王政》。成王旣踐奄,將遷其君於蒲姑,周公告召公,作《將蒲姑》。).’라고 하였다.

9) 『孟子』 「滕文公下」에는 ‘주공이 무왕을 도와 주왕을 주살하고 엄을 정벌한 지 삼 년 만에 그 군주를 토벌하고, 비렴을 바다 모퉁이로 몰아 죽였다. 멸망시킨 나라가 50개국이었고,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를 몰아내어 멀리 쫓아내자, 천하가 크게 기뻐하였다(周公相武王,誅紂,伐奄,三年討其君,驅飛廉於海隅而戮之。滅國者五十,驅虎、豹、犀、象而遠之,天下大悅。)’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秦本紀」에는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오래도 함께 죽었다. 이 때 비렴은 주왕을 위해 북방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보고할 곳이 없자, 곽태산에 단을 만들어 보고하였다. (비렴이) 죽자 곽태산에 장사지냈다.(周武王之伐紂,并殺惡來。是時蜚廉爲紂石(使)北方,還,無所報,爲壇霍太山而報……死,遂葬於霍太山。).’라고 기록되어 있다.

10) [⿸虍𡈼]은 초나라 문자에서 항상 吾로 읽는다. 邾吾는 곧 『尙書』 「禹貢」에 나오는 雍州의 ‘西傾、朱圉、鳥鼠至于太華。’의 주어(朱圉)이다. 『漢書』 「地理志」에서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의 주어(朱圉)에는 ‘「우공」의 주어산이 현 남쪽 오중취에 있다(《禹貢》朱圄山在縣南梧中聚。).’라고 기록되어 있다. 『水經注』 「渭水經」에도 주어산이 오중취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竝南出朱圉山,山在梧中聚。).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감곡현(甘谷縣) 서남쪽이다.

11)[⿱虘又]는 우선 차로 읽는다. 虘가 성부이고 又가 형부인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노차지융이 무슨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秦은 중원 기원의 여러 나라와 달리 문화적으로나 혈연적으로 이질적인 점이 많았기 때문에 그 기원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이른바 ‘동래설(東來說)’과 ‘서래설(西來說)’ 간의 논쟁이다. 왕국유(王國維)는 『史記』와 같은 전래문헌에 근거하여, 秦의 도읍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츰 옮겨과는 과정을 근거로 하여 秦이 서쪽에서 기원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서래설’을 주장하였다. 이 설은 秦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력한 설이 되었다. ‘서래설’에 대해, 秦을 중국 속에서 이해하기 위하여 秦의 기원을 동방에서 찾으려고 하는 학자들 또한 있었다. 徐旭生과 같은 학자는 商과 秦 모두 玄鳥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少皞를 제사 지냈고, ‘주가 삼감의 난을 진압한 뒤 이들을 회하(淮河) 및 섬서(陝西) 지역으로 이주시켰다.’라는 『逸周書』의 기록을 들며, 秦의 조상을 東夷 집단이라고 주장하였는데, 顧頡剛, 錢穆, 林劍鳴 등의 학자가 이를 따랐다. 그렇지만 『史記』 「진본기」에는 ‘동래설’을 반박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史記』에 근거하여 ‘서래설’을 견지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80년대 이후로는 고고학 자료를 사용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결정적인 근거가 부족하여 논의는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2011년 『繫年』의 발표로 인해 ‘동래설’이 주류 학설이 되었다. 이학근(李學勤)은 『繫年』 제3장의 내용을 통해 ‘동래설’과 ‘서래설’ 간의 논쟁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동쪽 상엄(商奄)의 백성들을 현재의 감숙성 감곡(甘谷) 모가평(毛家坪) 유지의 주어(朱圉)로 옮겼는데, 이들이 秦의 선조가 되므로 진의 ‘동래설’이 옳다는 것이다.
마왕퇴(馬王堆)에서 나온 漢墓 帛書 중 『戰國縱橫家書』 「蘇秦謂燕王」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스로 회복하고 만족한다면, 초나라는 저수와 장수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진나라는 상엄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自復而足,楚將不出雎(沮)章(漳),秦將不出商閹(奄)……).’ 한편 이 기록은 『戰國策』 「燕策一」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以自憂爲足,則秦不出殽塞,齊不出營丘,楚不出疏章。’로 되어 있다. 商閹이 殽塞로 바뀌어 있다.

12) 학자에 따라서 [⿱弓山]으로 석문하기도 하고, 小寺 같은 경우는 危로 예정하고 衛로 읽기도 한다. 정리자에 따르면, 从尸从山 글자인데, 고문자에서 편방 尸는 매우 자주 편방 人과 통용되므로 정리자는 『說文解字』의 仚으로 예정하였다. 仚는 曉母元部 글자인데, 정리자는 여기에서는 匣母元部 글자인 扞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扞은 『左傳』 桓公 12년 杜預의 주석에 ‘지키는 것이다(衛也。).’라고 풀이되어 있다.

13) 『國語』 「晉語八」에 나오는 ‘지금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졌다(今周室少卑。).’라는 구절에 대해 韋昭는 ‘卑는 미약해지는 것이다(卑,微也。).’라고 풀이하였다.

14) 秦仲은 진(秦) 양공(襄公)이다. 「秦本紀」에 따르면, 진중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그중 장남은 장공(莊公)이었고, 장공은 서견구(西犬丘)에서 살면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은 세보(世父)였다. 주 선왕이 즉위할 때 진중을 대부로 삼아 서융을 토벌한 일이 있었는데 서융이 진중을 죽였다. 이에 세보는 “융이 나의 할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융의 왕을 죽이지 않으면 봉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아우 양공에게 자리를 양보하였으니, 양공이 태자가 되어 즉위하게 되었다.

참고 문헌


저본)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
김병준, 「청화간(淸華簡) <계년>(繫年)의 비판적 검토— 진(秦)의 기원과 관련하여」, 『인문논총』 제73권 제3호, 2016
白川靜, 「金文通釋 卷一上」, 『白鶴美術館雜誌』 第二輯三, 1962
李裕杓, 「西周 金文에 보이는 ‘秦夷’와 『繫年』의 ‘商奄之民’」, 『동양사학연구』 135, 2016.
李學勤, 「清華簡≪繫年≫及有關古史問題」 , 『文物』 2011-3, 2011. 김병준(2016)에서 재인용.
李學勤, 「談秦人初居“邾吾”的地理位置」 , 『出土文獻』 2, 2011. 김병준(2016)에서 재인용.
黃留珠, 「秦文化二源說」 , 『西北大學學報』 1995-3, 1995.

'한문학 > 『繫年』 역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년(繫年)』4장  (0) 2022.01.23
『계년(繫年)』2장  (0) 2021.09.12
『계년(繫年)』1장  (1) 2021.08.15
posted by 취상
:
한문학 2021. 9. 17. 16:39

본 게시글의 이미지나 석문, 번역 또는 주석을 다른 곳에 활용하실 경우에는 출처(닉네임블로그 이름URL 링크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를 밝혀주세요.

[淸]王引之 『經義述聞』 第二十二 「春秋名字解詁 上」 一百五十五條

001. 鄭游吉字子大叔。

정(鄭)나라 유길(游吉)의 자는 자대숙(子大叔)이다. 

[襄二十八年《左傳》。]

[『좌전』 양공 28년에 보인다.]

取大吉之義也。大當如字讀。二十二年、二十四年傳《釋文》1)竝音泰,非也。大叔,《論語》〈憲問〉篇2)作‘世叔’。世、大聲相近。大,正字也;世,俗字也。桓九年傳《正義》曰:“諸經稱世子及衛世叔申,經作世字,傅皆作大。”然則古者世之與大,字義通也。案《公羊》經文十三年,‘世室屋壞’,《左氏》、《穀梁》竝作‘大室’。《左氏》經昭二十五年‘樂大心’,《公羊》作‘樂世心’。〈曲禮〉:“不敢與世子同名。”,鄭注曰:“世或爲大。”則大、世古通用也。《爾雅》:“父之昆弟,先生爲世父,後生爲叔父。”《釋名》:“父之兄曰世父,言爲嫡統繼世也。”案世亦大也。叔、小雙聲。世、大疊韻。世父、叔父相對成文。則叔爲小,世爲大也。若但以繼世爲解,則何以解於父之仲兄不爲後者乎?3)

대길(大吉)의 뜻을 취한 것이다. 大는 마땅히 여자(如字)로 읽어야 한다. 『경전석문』 (󰡔좌전󰡕 양공) 22년, 24년의 전에서는 모두 음을 태(泰)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大叔은 『논어』 「헌문」 편에는 世叔으로 되어 있다. 世와 大는 소리가 서로 비슷하다. 大는 정자(正字)이고 世는 속자(俗字)이다. 『(좌전)정의』 환공 9년에서는 “여러 경문에서는 世子와 위나라 世叔申이라고 칭했는데, 경문에서는 世 字로 되어 있는 것이 전문에서는 모두 大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世와 大의 자의가 통했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공양전』 경문 문공 13년의 ‘世室屋壞’가 『좌전』과 『곡량전』에서는 모두 ‘大室’로 되어 있다. 『좌씨전』 경문 소공 25년의 ‘樂大心’이 『공양전』에서는 ‘樂世心’으로 되어 있다. 「곡례」 편의 “감히 세자와 이름을 같게 하지 못한다.”라는 구절에 정현(鄭玄)은 “世는 혹 大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으니, 곧 大와 世는 옛날에 통용되었다. 『이아』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먼저 태어난 사람을 세부(世父)라고 하고, 뒤에 태어난 사람을 숙부(叔父)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석명』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형을 세부(世父)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통으로 대를 잇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世는 또한 大이다. 叔과 小는 쌍성이다. 世와 大는 첩운이다. 세부(世父)와 숙부(叔父)가 상대되어 문장을 이룬다. 그렇다면 叔은 小가 되고, 世는 大가 된다. 만약 단지 대를 잇는 것으로 풀이를 삼았다면, 어째서 아버지의 둘째 형을 해석하여 후자(世父)라고 하지 않는 것인가?

1) 『經典釋文』 「春秋音義」 양공 22년 전에는 ‘大叔’의 大에 대해 ‘音泰’라고 하였고, 양공 24년 전에는 子大叔의 大에 대해 ‘音泰’라고 하였다.

2) 『論語』 「憲問」 편에는 '외교문서를 만들 때에 비침(裨諶)이 초안을 작성하고 세숙(世叔)이 검토하여 따지고 행인(行人) 자우(子羽)가 가감을 하고 동리(東里)의 자산(子産)이 윤색했다.'(‘爲命,裨諶草創之,世叔討論之,行人子羽修飾之,東里子産潤色之。)라고 되어 있다.

3) 아버지의 둘째 형도 대를 잇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단지 대를 잇기 때문에 아버지의 형을 世父라고 부른다면 아버지의 둘째 형도 世父라고 불러야 한다.

 

002. 晉梁養字餘子。

진(晉)나라 양양(梁養)의 자는 여자(餘子)이다.

[閔二年《左傳》。案餘子,猶言子餘也。冉求字有,而哀十一年傳謂之有子。有子,猶言子有也。晉有梁五、梁由靡、梁丙、梁益耳,俱以梁爲姓,梁餘子亦是也。文十一年《左傳正義》曰:“古人連言名字名者,皆先字後名。”案《傅》中有姓名與字竝稱者,若百里孟明視、苑羊牧之1),梁餘子養之類,皆先字而後名。《廣韻》及《元和姓纂》,以梁餘爲複姓,非也。]

[『좌전』 민공 2년에 보인다. 생각건대 여자(餘子)는 자여(子餘)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염구(冉求)의 자는 유(有)인데, 애공 11년의 전에는 그를 유자(有子)라고 이른다. 유자(有子)는 자유(子有)라고 말한 것과 같다. 진(晉)나라에는 양오(梁五), 양유미(梁由靡), 양병(梁丙), 양익이(梁益耳)가 있었는데, 모두 양(梁)을 성으로 삼았으니, 양여자(梁餘子) 또한 이렇다. 『좌전정의』 문공 11년에서는 “옛날 사람들이 이름과 자를 연달아 말할 때는 모두 자를 먼저 하고 이름을 나중에 한다.”라고 하였다. 『좌전』 중에서 성과 이름, 그리고 자를 아울러 칭한 것이 있으니, 백리(百里) ‘맹명(孟明)’ 시(視)와 원(苑) ‘양(羊)’ 목지(牧之)와 같은 것이다. 양(梁) 여자(餘子) 양(養)의 종류이니, 모두 자를 먼저 하고 이름을 나중에 한 것이다. 『광운』과 『원화성찬』에는 양여(梁餘)를 복성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大戴禮記》〈夏小正〉:“時有養日。”〈傳〉2)曰:“養,長也。”字或作羕。《爾雅》曰:“羕,長也。”餘,亦長也。《廣雅》:“餘,長,久也。”《老子》曰3):“脩之於家,其德乃餘。脩之於鄕,其德乃長。”長、餘,皆久也。養與餘,皆有長久之意,故名養字餘子。

『대대례기』 「하소정」에 이르기를, “때에는 긴 날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전(傳)에 이르기를, “養은 긴 것[長]이다.”라고 하였다. (梁養의) 자(字)는 羕으로 쓰기도 한다. 『이아』에 이르기를, “養은 긴 것[長]이다.”라고 하였다. 餘 또한 긴 것[長]이다. 『광아』에 이르기를, “餘와 長은 오래가는 것[久]이다.”라고 하였다. 『노자(도덕경)』에 이르기를, “집에서 (도를) 닦으면 그 덕이 넉넉할 것이다. 마을에서 (도를) 닦으면 그 덕이 오래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長과 餘는 모두 오래가는 것[久]이다. 養과 餘는 모두 장구(長久)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이름을 양(養)으로 하고 자를 여자(餘子)라 한 것이다.

1) 일반적으로는 苑羊 자체를 복성으로 여기나, 왕인지는 『左傳』 소공 20년에 苑何忌라는 사람이 등장하므로, 苑이 성이라고 주장하였다. 王引之, 「春秋名字解詁 下」 39B면.

2) 『대대례기』 「하소정」은 경과 전으로 이루어진 편이다.

3) 『도덕경』 54장이다.

 

003. 吳伯嚭字子餘。

오(吳)나라 백비(伯嚭)의 자는 자여(子餘)이다. 

[哀八年《左傳》。]

[『좌전』 애공 8년에 보인다.]

嚭之言丕也。《說文》:“嚭,大也。”物小則不足,大則有餘,故名嚭字子餘。或曰:“嚭與餘,皆謂眾多也。”嚭、伾,古同聲。《廣雅》曰:“伾伾,眾也。”高誘注《呂氏春秋》〈辯士篇〉曰:“餘猶多也。”孔晁注《周書》1)〈糴匡篇〉曰:“餘,眾也。”

비(嚭)라는 말은 크다[丕]는 것이다. 『설문해자』에 이르기를, “嚭는 크다[大]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물건이 작으면 부족하고 크면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이름을 비(嚭)라 하고 자를 자여(子餘)라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嚭와 餘는 모두 매우 많다[眾多]는 것을 이른다.”라고 한다. 嚭와 伾는 옛날에 음이 같았다. 『광아』에 이르기를, “伾伾는 많은 것[眾]이다.”라고 하였다. 『여씨춘추』 「변사편」 고유(高誘) 주(注)에 이르기를, “餘는 많다[多]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주서』 「적광편」 공조(孔晁) 주(注)에 이르기를, “餘는 많은 것[眾]이다.”라고 하였다.

1) 『周書』는 『逸周書』를 말한다.

 

004. 楚秦商字子丕。

초(楚)나라 진상(秦商)의 자는 자비(子丕)이다. 

[《史記》〈仲尼弟子傳〉。]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보인다.]

商與章,古字通。[〈費誓〉:“我商賚女。”《釋文》曰:“商,徐音章。”《呂氏春秋》〈勿躬篇〉:“臣不如‘弦章’。”《韓子》〈外儲說〉作‘弦商’。1)]商之言章,盛也,大也。《呂氏春秋》〈審時篇〉:“得時之稼,其氣章。2)”高誘注曰:“章,盛也。”《孝經內事圖》:“帝座章而光。”宋均注曰:“章,大也。”[孫瑴《古微書》引。3)]商有盛大之義,故字子丕。《爾雅》曰:“丕,大也。”孔子弟子,卜商字子夏。《漢書》〈儒林傳〉:“許商字伯長。”〈漢繫陽令碑陰〉:“張商字伯瑋。”[與億同。]夏也,長也,瑋也,皆大也。

商과 章는 옛날에 글자가 통했다. [『서경』 「주서」 비서편에 이르기를, “내가 헤아려 너희들에게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전석문』에 이르기를, “商은 서원(徐爰)의 음으로는 章이다.”라고 하였다. 『여씨춘추』 「물궁편」에 이르기를, “신은 ‘현장(弦章)’과 같지 않습니다.”라 하였는데, 『한비자』 「외저설 좌하(外儲說 左下)」에는 ‘현상(弦商)’으로 되어 있다.] 商이라는 말은 章이며, 성한 것[盛]이고 큰 것[大]이다. 『여씨춘추』 「심시편」에 이르기를, “때를 얻어 농사를 지으면 그 기운이 성하다.”라고 하였다. 고유(高誘) 주에 이르기를, “章은 성한 것[盛]이다.”라고 하였다. 『효경내사도』에 이르기를, “오제좌(五帝座)가 커지고 빛난다.”라고 하였다. 송균(宋均) 주에 이르기를, “章은 큰 것[大]이다.”라고 하였다. [손곡(孫瑴)의 『고미서(古微書)』에서 인용하였다.] 商은 성대하다는 뜻이 있으므로 字를 子丕라고 한 것이다. 『이아』에 이르기를, “丕는 큰 것[大]이다.”라고 하였다. 공자의 제자 중에 복상(卜商)은 자가 자하(子夏)이며, 『한서』 「유림전」에 이르기를, “허상(許商)은 자가 백장(伯長)이다.”라고 하였고, 「한번양령비(漢繫陽令碑)」의 비음(碑陰)에 이르기를, “장상(張商)은 자가 백위(伯瑋)이다.”라고 하였으니[(瑋는) 億과 같다.], 夏, 長, 瑋는 모두 큰 것[大]이다.

1) 『여씨춘추』 「물궁편」에는 '신이 弦章과 같지 않으니, 그를 大理로 세우소서.'(‘臣不若弦章,請置以爲大理。’)라고 되어 있는 것이 『한비자』 「외저설 좌하」에는 '夷吾는 弦商과 같지 않으니, 그를 大理로 세우소서.'(‘夷吾不如弦商,請立以爲大理。’)로 되어 있다. 여기서 『여씨춘추』와 『한비자』는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弦章과 弦商은 문맥상 같은 사람이다.

2) 『여씨춘추』 「심시편」에는 '이 때문에 때를 얻어 농사를 지으면 그 향기가 향기롭고, 그 맛이 달며, 그 기운이 성하다.'(‘是故得時之稼,其臭香,其味甘,其氣章。’)라고 되어 있다.

3) 孫瑴의 『古微書』 卷31 孝經內事圖에 ‘왕 노릇을 하는 사람이 혐의를 피하고 미묘한 부분을 분별하며 귀천을 다르게 하고 교만한 신하를 억누르며 소동을 잊어버리면, 병성이 밝고 윤택해지며, 오제좌가 크고 밝아진다.’(‘王者遠嫌別微,殊貴賤,抑驕臣,忘亂子,則屏星爲之明以潤,帝座章而光。')이라 되어 있으며, 宋均은 ‘병성과 오제좌가 밝고 윤택해지는 것이다. 章은 큰 것이다.’(‘屏星、五帝座明以潤。章,大也。’)라고 주석하였다. 屏星은 屛宿를 가리키며, 五帝座는 자미원과 태미원에 있는 다섯 방위를 주재하는 신들의 별자리이다.

 

005. 衛卜商字子夏。

위(衛)나라 복상(卜商)의 자는 자하(卜商)이다.

[〈仲尼弟子傳〉。]

 [「중니제자열전」에 보인다.]

〈樂記〉曰:“夏,大也。”秦商字子丕,則商亦大也。商、章,古字通。[見上。]《漢書》〈遊俠傳〉:“萬章字子夏。”與此同意。或曰:“取章夏爲義也。”〈春官鐘師〉:“九夏1)有章夏。”杜子春云2):“臣有功,奏章夏。”或曰:“商,殷商也。夏,夏后氏也。3)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夏는 큰 것[大]이다.”라고 하였다. 진상(秦商)의 자가 자비(子丕)이니, 곧 商 또한 큰 것[大]이다. [위에 보인다.] 『한서』 「유협전」에 이르기를, “만장(萬章)의 자는 자하(子夏)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과 뜻이 같다. 혹자가 말하기를, “장하(章夏)를 취해 뜻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례』 「춘관 종사」에 이르기를, “구하(九夏) 중에 장하(章夏)가 있다.”라고 하였다. 두자춘(杜子春)이 말하기를, “신하에게 공이 있으면 장하(章夏)를 연주한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商은 은상(殷商)이고, 夏는 하후씨(夏后氏)이다.”라고 하였다.

1) 鐘師는 鐘과 鼓로 九夏, 곧 아홉 가지 곡을 연주하는 관직이다. 『주례』에 따르면 九夏는 다음과 같다. 「王夏」, 「肆夏」, 「昭夏」, 「納夏」, 「章夏」, 「齊夏」, 「族夏」, 「祴夏」, 「驁夏」.

2) 두자춘(杜子春)은 서한(西漢) 말엽의 학자로 정중(鄭衆), 가규(賈逵) 등의 스승이다. 두자춘의 이 말은 『周禮』 「春官 鐘師」의 정현(鄭玄) 주(注)에 보인다.

3) 하(夏)나라의 시조 우왕(禹王)을 가리킨다.

 

posted by 취상
:
한문학/『繫年』 역주 2021. 9. 12. 21:33

본 게시글의 이미지나 석문, 번역 또는 주석을 다른 곳에 활용하실 경우에는 출처(닉네임블로그 이름URL 링크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를 밝혀주세요.

『繫年』 2장은 5호간부터 12호간까지 총 8개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포사 이야기, 주나라의 멸망, 주나라의 동천, 진(晉)나라, 정나라, 초나라의 확장과 정 장공(莊公) 사후 정나라의 왕위 분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확대한 5호간, 6호간, 7호간, 8호간, 9호간
왼쪽부터 확대한 10호간, 11호간, 12호간

아래 이미지는 참고 문헌을 토대로 고문자를 예정하고 통가자의 경우 본자를 밝힌 것입니다. 죽간에 기록된 문자의 양이 꽤 많기 때문에 두 개로 나누었습니다.

위 이미지를 토대로 표점을 달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周幽王取妻于西申1),生平王,王或取褒人之女2),是褒姒,生伯盤3)。褒姒嬖于王,王與伯盤逐平王,平王走西申4)。幽王起師,圍平王于西申,申人弗畀,繒人乃降西戎,以攻幽王5),幽王及伯盤乃滅,周乃亡。邦君、諸正乃立幽王之弟余臣于虢6),是攜惠王7)。立二十又一年,晉文侯仇乃殺惠王于虢8)。周亡王九年9),邦君、諸侯焉始不朝于周,晉文侯乃逆平王于少鄂10),立之于京師11)。三年,乃東徙,止于成周,晉人焉始啟于京師12),鄭武公亦正東方之諸侯13)。武公卽世14),莊公卽位,莊公卽世,昭公卽位15)。其大夫高之渠彌殺昭公而立其弟子眉壽16)。齊襄公會諸侯于首止,殺子眉壽,車轘高之渠彌,改立厲公17),鄭以始正18)。楚文王以啟于漢陽19)

주 유왕은 서신에서 아내를 취하여 평왕을 낳았다. 왕은 또 포나라 사람의 딸도 취하였으니, 이 사람이 포사로, 백반을 낳았다. 포사는 왕에게 사랑을 받았고, 왕과 백반은 평왕을 축출하였으니, 평왕은 서신으로 달아났다. 유왕이 군사를 일으켜 평왕을 서신에서 포위하였는데, 신나라 사람들은 넘겨주지 않았고, 증 사람들은 이에 서융을 끌어들여 유왕을 공격하니, 유왕과 백반이 이에 죽고, 주나라는 이에 멸망하게 되었다. 방군과 제정이 이에 유왕의 아우 여신을 괵 땅에서 옹립하였으니, 이 사람이 휴혜왕이다. 즉위 21년에 진나라 문후 구가 혜왕을 괵 땅에서 죽였다. 주나라에 왕이 없어진 지 9년, 방군과 제후가 이때 주나라에 조회하지 않기 시작하자, 진나라 문후가 이에 평왕을 소악 땅에서 맞이하여 그를 경사 땅에서 옹립하였다. 3년 뒤에 동쪽으로 옮겨 성주 땅에 이르자, 진나라 사람들이 이때 경사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정나라 무공 또한 동방의 제후들을 다스렸다. 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장공이 즉위하였고, 장공이 세상을 떠나자 소공이 즉위하였다. 그 대부 고거미가 소공을 죽이고 그 아우 자미 수를 옹립하였다. 제나라 양공이 수지 땅에서 제후들과 회합하여 자미 수를 죽이고 고거미를 거열형에 처했다. 여공을 고쳐 세우니, 정나라가 다스려지기 시작했다. 초나라 문왕은 한양 땅에 진출하였다.


1) 『史記』 「周本紀」에는 유왕(幽王)의 왕후가 신나라 후작의 딸[申侯女]로 되어 있다.

2) 孚는 『國語』 「晉語 一」과 「鄭語」, 『史記』 「周本紀」 등에 모두 褒로 되어 있다. 상고에 음이 서로 비슷했으므로 서로 통가한 것이다.

3) 伯盤은 기존의 伯服과 동일 인물이다. 方詩銘과 王修齡의 『古本竹書紀年輯證』(修訂本) 59~60p에 의하면, 伯服 쪽이 오류이다. 『國語』 「鄭語」나 『史記』 「周本紀」 같은 곳에는 伯服으로 되어 있고, 『太平御覽』 卷85에는 伯盤으로 되어 있다. 『商書』의 盤庚이 갑골문과 『國語』에서는 般庚으로 서사되고, 『尙書』의 甘盤이 『史記』 「燕世家」에서는 甘般으로 서사되는 것처럼 盤은 흔히 생략형인 般으로 서사되는데, 이것은 服과 형태가 비슷하기 때문에 『國語』, 『史記』 등에서 盤을 服으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4) 『左傳正義』 昭公 26年 조에서는 『紀年』을 인용하여 평왕이 서신으로 출분하였고, 백반이 태자로 옹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平王奔西申,而立伯盤以爲大子。’).

5) 『國語』 「鄭語」에서 ‘신나라, 증나라, 서융은 한창 강해지고 있고 왕실은 한창 소란스러워지고 있는데 마음대로 욕심을 부리려고 하니 어려워지지 않겠는가? 왕이 태자를 죽이고 백복을 태자로 만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신나라에서 구할 것이니, 신나라 사람들이 내어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벌할 것이다. 만약 신나라를 정벌한다면 증나라와 서융이 힘을 모아 주나라를 칠 것이니 주나라는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申、繒、西戎方強,王室方騷,將以縱欲,不亦難乎?王欲殺太子以成伯服,必求之申,申人弗畀,必伐之。若伐申,而繒與西戎會以伐周,周不守矣!’)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상황을 가리킨다.

6) 邦君은 제후를 가리킨다. 正은 ‘長’의 의미이다. 『左傳』 昭公 26년의 ‘幽王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주나라를 돕지 않아 왕이 혼미하여 도리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왕위를 잃었고 攜王이 천명을 범했다.’(‘至于幽王,天不弔周,王昏不若,用愆厥位,攜王奸命。’)라는 기사에 대해 『左傳正義』는 『紀年』을 인용하여 幽王이 죽자 虢公 翰이 왕자 余臣을 攜 땅에서 세워 두 왕이 병립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幽王旣死,而虢公翰又立王子余臣於攜,周二王並立。’). 簡文의 ‘虢’은 그때 이미 지금의 河南 三門峽으로 천도했을 수 있는 西虢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余 밑에 있는 口는 순전히 장식적인 필획으로, 특별한 의미 없이 서사되는 경우가 많다. 왕자 余臣이 幽王의 동생이라는 것은 『繫年』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다.

7) 攜는 지명으로 보인다. 雷學淇은 『竹書紀年義證』 卷27에서 ‘『新唐書』에서 전재된 『大衍曆議』에 豊, 岐, 驪, 攜 지역이 모두 鶉首의 分野이고, 雍州의 땅이라고 하였으므로 곧 攜는 서경의 지명이다.’라고 주장하였다.(‘攜,地名,未詳所在。『新唐書』所載『大衍曆議』謂豐、岐、驪、攜皆鶉首之分,雍州之地,是攜即西京地名矣。’)

8) ‘立二十又一年’이라 한 것은 휴혜왕의 재위 햇수를 가리킨다. 『左傳正義』 昭公 26년 조에서는 『紀年』을 인용하여 휴혜왕 재위 21년 휴혜왕이 진나라 문공에게 살해되었고, 본디 적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휴왕(攜王)이라고 하였다고 설명하였다.(‘二十一年,攜王爲晉文公所殺。以本非適,故稱攜王。’) 재위 21년이라는 것이 『左傳正義』와 『繫年』에서 모두 일치한다. 진나라 문후가 여신을 죽여 두 왕이 병립하는 구도를 종결시켰으므로 『鄭語』에서 ‘진나라 문후가 이에 천자를 안정시켰다.’(‘晉文侯於是乎定天子。’)라고 한 것이다.

9) ‘周亡王九年’은 역대로 논쟁이 많은 구절이다. 李學勤 등은 『繫年』을 정리하면서 이 구절을 ‘주나라에 왕이 없게 된 지 9년’으로 해석하고 幽王이 죽은 지 9년이 되는 해 즉 기원전 762년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劉國忠이나 王暉 등은 이 구절이 攜惠王이 죽은 뒤 9년이 되는 해 즉 기원전 741년이라고 생각하였으며, 王紅亮 등 ‘亡王’을 ‘亡國之王’으로 이해하여 주나라를 멸망하게 한 幽王으로 보아 이 구절이 유왕 9년 즉 기원전 773년을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繫年』에 따르면, 평왕이 경사에서 옹립된 후 3년 후에 성주로 동천했으므로, 세 견해에서 동천 연대는 각각 기원전 759년, 738년, 770년이다. 세 견해 모두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심재훈, 「전래문헌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도전 - 淸華簡 『繫年』의 周 왕실 東遷」, 「역사학보」 221, 2014 참조.

10) 少鄂은 지명이며, 『左傳』 隱公 6년에 언급되는 진(晉)나라 땅 鄂, 곧 지금의 山西 鄕寧을 가리킨다. 한편, 심재훈(2014)은 少鄂이 南陽 인근의 鄂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1) 이 京師는 宗周, 곧 豐鎬 또는 鎬京이다. 『左傳正義』 昭公 26년 조에서는 『紀年』을 인용하여 ‘평왕이 西申으로 달아나 伯盤이 태자로 옹립되었고, 유왕과 함께 戲에서 죽었다. 이보다 먼저 申侯와 魯侯와 許文公이 평왕을 申에서 옹립하였기 때문에 본래의 태자는 天王이라 불렸다. 유왕이 죽고 虢公 翰이 또 왕자 余臣을 攜에서 옹립하였으니, 주나라에 두 왕이 병립하였다.’(‘平王奔西申,而立伯盤以爲大子,與幽王俱死於戲。先是申侯、魯侯及許文公立平王於申,以本大子,故稱天王。幽王旣死,而虢公翰又立王子余臣於攜,周二王並立。’)라고 하였는데, 『繫年』의 簡文과는 같지 않은 것이 있다.

12) 始啟의 啟는 『詩經』 「魯頌」 閟宮 편의 ‘너의 나라를 크게 넓힌다.’(‘大啟爾宇。’)라는 구절과 『左傳』 僖公 25년 전의 ‘晉이 이때부터 비로소 南陽으로 영토를 開拓하였다.’(‘晉於是始啓南陽。’)라는 구절에서 보이듯이 ‘개척하다, 확장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13) 정나라 武公은 주나라 宣王의 동생인 정나라 桓公의 아들이다. 『史記』 「鄭世家」에 의하면, 犬戎이 驪山의 아래에서 幽王과 桓公을 죽였는데, 정나라 사람들은 그 아들 掘突, 곧 武公을 옹립하였다고 한다.

14) 卽世는 세상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구절은 무공의 사망 이후 정나라의 왕위가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15) 『左傳』 桓公 11년과 「鄭世家」에 의하면, 莊公이 죽은 후에 그 아들 厲公이 한 번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繫年』의 簡文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장공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 특히 太子 忽, 公子 突, 公子 亹, 그리고 公子 嬰(혹은 儀)이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었기 때문에 당시 정나라는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장공이 죽은 후 태자 홀이 즉위하여 昭公이 되었지만, 宋 莊公이 개입하여 소공이 축출되어 위(衛)나라로 도망가고 공자 돌이 즉위하여 厲公이 되었다. 여공은 정권을 차지한 祭仲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채(蔡)나라로 달아나고 소공이 다시 즉위하였다. 소공은 복위에 성공하였지만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대부 高渠彌에게 시해당하게 된다. 고거미는 공자 미를 옹립하였는데, 齊 襄公이 首止 회합에서 공자 미와 고거미를 모두 죽였다. 이에 채중은 정나라 국내에서 공자 영(혹은 의)를 옹립하였다. 공자 영(혹은 의)는 비교적 정나라를 길게 통치했으나, 여공에게 투항한 傅瑕에게 시해당하게 되고 부하는 다시 여공을 옹립하게 된다. 여공이 다시 왕위에 오름으로써 장공의 아들들 사이에 일어난 왕위 계승 분쟁은 종결되게 된다. 이 복잡한 정나라 왕위 계승 분쟁은 『繫年』에서 아주 간략하게만 다루어진다.

16) 高之巨爾는 高渠彌이다. 之는 조사로, 선진시기에는 성과 이름 사이에 之를 넣는 용법이 있었다. 고거미가 정 소공을 시해한 일은 『左傳』 桓公 17년 조에 보인다. 한편, 釁壽는 『左傳』에는 公子 亹로 기록되어 있다. 釁과 亹는 성부가 같은 해성자이며, 亹는 眉로 읽는다. 『方言』에는 ‘眉는 老이다. 동제에서는 眉라고 한다.’(‘眉,老也,東齊曰眉。’)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爾雅』에는 ‘老는 壽이다.’(‘老,壽也。’)라고 하였으므로, 眉와 壽가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壽는 ‘오래 살다.’라는 의미이다. 王寧은 2014년 「“彔子聖”之名臆解」라는 글에서 子亹가 자이고 壽가 휘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선진 시대 사람들의 字의 형태는 ‘子某’이지 ‘子某某’가 아니며, ‘子釁壽’라는 표기가 簡文에 두 차례나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은 잘못 적힌 것이 아니라면 자와 휘를 연달아 쓴 것일 것이고, 옛 사람들은 자를 먼저 쓰고 휘를 썼기 때문에 ‘子釁壽’라는 표기를 통해 子釁 즉 子亹의 휘가 壽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7) 『左傳』과 『繫年』은 首止 회합에 대해 살짝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左傳』 桓公 18년 조에서는 子亹와 高渠彌가 首止 땅에 주둔한 齊 襄公을 만나러 갔다고 기록한 반면(‘秋,齊侯師于首止,子亹會之,高渠彌相。七月,戊戌,齊人殺子亹,而轘高渠彌。’), 『繫年』에서는 齊 襄公이 首止 땅에서 제후들과 회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左傳』의 같은 부분에서는 공자 미가 죽자 祭仲은 진(陳)나라에서 昭公의 동생 子儀(또는 子嬰)를 맞이하여 옹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祭仲逆鄭子于陳而立之。’), 簡文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 政은 ‘正’과 통한다. 또한 여기서 正은 定의 의미이다. 定은 정나라 공자들의 왕위 쟁탈전이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19) 漢陽은 漢水 동북부 지역이다. 『史記』 「楚世家」에서는 ‘초나라가 강해져 장강과 한수 사이의 소국들을 능멸히니, 소국들이 모두 초나라를 두려워했다.’(‘楚彊,陵江、漢閒小國,小國皆畏之。’)라고 하였고, 『左傳』 僖公 28년에서는 ‘漢陽의 여러 姬姓 국가들을 초나라가 실로 멸하였다.’(‘漢陽諸姬,楚實盡之。’)라고 하였다.


참고 문헌

저본)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

雷學淇, 『竹書紀年義證』, 저본에서 재인용

方詩銘, 王修齡, 『古本竹書紀年輯證』, 上海古籍出版社, 2005.

심재훈, 「전래문헌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도전 - 淸華簡 『繫年』의 周 왕실 東遷」, 『역사학보』 221, 2014.

王寧, "“彔子聖”之名臆解", 復旦大學出土文獻與古文字硏究中心, 2014년 6월 4일 수정, 2021년 9월 12일 접속, http://www.gwz.fudan.edu.cn/Web/Show/2281#_edn11.

'한문학 > 『繫年』 역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년(繫年)』4장  (0) 2022.01.23
『계년(繫年)』3장  (0) 2021.11.06
『계년(繫年)』1장  (1) 2021.08.15
posted by 취상
:
한문학/『繫年』 역주 2021. 8. 15. 19:43

본 게시글의 이미지나 석문, 번역 또는 주석을 다른 곳에 활용하실 경우에는 출처(닉네임블로그 이름URL 링크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를 밝혀주세요.

『계년』은 청화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국시대 죽간에 포함되어 있는 문헌입니다. 이 문헌에는 본래 제목이 없으나,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칭화대학에서는 정리하면서 繫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학자들은 이 문헌이 초 숙왕(楚 肅王) 때 기록된 것으로 여기는데, 그렇다면 『죽서기년(竹書紀年)』보다 오래된 것입니다. 『계년』은 총 138개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간의 훼손을 제외하고는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문헌은 기존 전래문헌인 『사기(史記)』, 『국어(國語)』, 『좌전(左傳)』 등에 누락되어 있는 이야기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이하 저본)에 나온 도판과 석문을 가지고 간단한 번역과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繫年』 1장은 1호간부터 4호간까지 총 4매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건국, 그리고 주나라의 10대 왕인 여왕(厲王)의 축출과 공백(共伯) 화(和)의 통치, 주나라 11대 왕인 선왕(宣王)의 즉위, 견융(犬戎)의 주나라 침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각 죽간에는 대략 28~29자가 쓰여 있습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西周의 사적을 서술하고 있는데, 주나라 왕실이 어떻게 쇠락했고 진(晉)나라, 정나라, 초나라, 진(秦)나라, 위(衛)나라 등의 제후국들이 어떻게 주나라를 대신하여 패권을 잡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확대한 1호간, 2호간, 3호간, 4호간

『계년』은 초나라의 옛 글자체로 쓰여 있어 쉽게 읽을 수 없습니다. 상고 시대 사람들은 글을 쓰면서 통가를 활발하게 한 데다가 상고 시대 사람들이 썼던 한자가 세월이 지나면서 도태되어 사라진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 글을 더욱 읽기 어렵게 합니다. 아래 이미지는 참고 문헌을 토대로 고문자를 예정(隸定, 옛 글씨체를 현대의 글씨체로 옮기는 일)한 것입니다. 통가자의 경우 본자를 밝혔습니다.

위 이미지를 토대로 표점을 달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周武王監觀王之不恭上帝1),禋祀不寅2),乃作帝籍3),以烝4)祀上帝天神名之曰千畝5),以克反6)商邑,敷政天下7),至于8)厲王厲王大虐于,卿士、諸正9)、萬民弗忍于厥心,乃歸10)厲王11)12)伯和13)。十又四年,厲王宣王宣王卽位14)共伯和歸于宗15)宣王是始棄帝籍弗田16),立卅又九年,乃大敗師于千畝17)

옛날 주 무왕께서 상나라 왕이 상제를 공경하지 않은 것과 인 제사가 공경스럽지 않음을 보고 곧 제적(왕이 직접 경작하는 밭)을 만들어서 상제와 천신께 증 제사를 지냈으니, 그곳을 이름하여 천무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상읍을 전복시키고 천하에 정치를 펴다가 여왕 대에 이르러 여왕이 주나라를 크게 학대하니, 경사와 모든 장로와 만민이 그 마음을 용인하지 않았다. 곧 여왕을 체 땅으로 쫓아내니, 공백 화가 섰다. 14년 뒤, 여왕이 선왕을 낳았고, 선왕이 즉위하였으니, 공백 화는 그 종국(宗國)인 위(衛)나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선왕, 이 왕은 비로소 제적을 폐기하고 밭을 갈지 않았다. 즉위한 지 39년, 융적이 곧 천무에서 주나라 군사를 크게 패배시켰다.


1)上帝에 붙은 =는 합문 부호이다.

2)寅은 공경하다의 의미이다. 『爾雅』 「釋詁」에 ‘儼,恪,祇,翼,諲,恭,欽,寅,熯,敬也。’라고 되어 있다.

3)帝籍은 왕이 직접 경작하는 전적(田籍)이며, 천자의 상징적인 친경지(親耕地)이다. 여기에서 籍은 『國語』 「周語 上」의 빌린다는 것은 백성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다.’(‘借也借民力以爲之’)라는 주석에 따라 ‘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田籍은 고대의 천자 또는 제후가 백성들의 인력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밭이다. 전적의 규모는 천자가 1천 무, 제후가 1백 무이다.

4)저본에서는 ⿱登示 형태의 글자를 登으로 석문하고 『禮記』 「月令」의 농부는 이에 기장을 진상한다.’(‘農乃登黍’)라는 문장을 근거로 ‘진상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陳民鎭은 「略說清華簡《繫年》的“烝”」이라는 2012년 글에서 같은 글자를 示라는 형부와 登이라는 성부가 결합한 것으로 보고 제사 이름으로 파악하여 烝으로 석문하고 ‘제사의 일종’으로 풀이하였다. 여기서는 후자를 따른다.

5)천무는 주나라 무왕이 설치한 전적의 이름이다.

6)反은 『說文解字』에 ‘反,覆也。’로 풀이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克과 함께 쓰여 전복시키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7)『詩經』 「商頌」의 長發 편에 너그러이 정사를 베푸시네.’(‘敷政優優’)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8)至于에 붙은 =는 합문 부호이다.

9)正은 『爾雅』 「釋詁」의 ‘育,孟,耆,艾,正,伯,長也。’에 따라 ‘우두머리, 장관’의 의미로 해석한다.

10)여기서 歸는 단순히 '돌아가다' 내지 '가다'의 의미가 아니라, '가서 돌아오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周禮』 「大宗伯」의 주석에 歸를 '不反之稱'으로 푼 예시가 있다.

11)徹은 초나라 죽간에서 育攵로 쓰인다. 한편, 전래문헌(左傳』 昭公 26 至于厲王王心戾虐萬民弗忍居王于彘’)에 의하면 여왕이 쫓겨난 곳은 彘 땅이다. 彘와 徹은 상고에 발음이 비슷하였으므로, 통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여왕이 彘 땅으로 쫓겨나게 된 경위에 대한 서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여왕이 자의로 땅으로 도망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왕이 타의로 彘 땅에 유치되었다는 것이다.  史記』 「周本紀」의 '王行暴虐侈傲國人謗王(중략) 於是國莫敢出言三年乃相與畔襲厲王厲王出奔於彘。'라는 기록과 晉世家」의  '國人作亂厲王出奔于彘。'라는 기록, 그리고 금본 『竹書紀年』의 '十二年王亡奔彘。', '十三年王在彘共伯和攝行天子事。', '二十六年大旱王陟于彘。'라는 기록은 전자에 속한다. 반면에 『左傳』 소공 26년의 '至于厲王王心戾虐萬民弗忍居王于彘。'라는 기록과 『國語』 周語上」의 '厲王虐國人謗王(중략) 三年乃流王于彘。'라는 기록은 후자에 속한다. 繫年』의 기록은 경사와 여러 장로, 주나라 국민의 타의에 의해 체 땅으로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左傳』과 『國語』의 기록과 가깝다.

12)은 『繫年』, 특히 동일한 3호간 안에서도 으로 쓰이기도 하고, ⿱龍丌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共和의 성격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기록이 다르다. 『史記』 「周本紀」에서는 '召公周公二相行政號曰共和共和十四年厲王死于彘。'라고 하고, 晉世家」에서는 '國人作亂厲王出奔于彘大臣行政故曰共和。'라고 하여 召公周公 또는 대신들의 공동 행정으로 기술하고 있다. 반면 今本 『竹書紀年』에서는 '十三年王在彘共伯和攝行天子事。'라고 하여 共伯 和라는 사람의 섭정이라고 기술하고 있고, 古本 『竹書紀年』에서는 '共伯和于王位。'라고 하여 공백 화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繫年』에 등장하는 공백 화는 『죽서기년』에 나오는 '공백 화'와 가깝다.

13)공화 시기 14년과 여왕이 체 땅에서 죽은 것, 선왕이 즉위한 것에 대해서는 『사기』, 두 판본의 『죽서기년』, 『계년』의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

14)선왕은 여왕의 아들이지만 여왕이 이때 선왕을 낳은 것은 아니다.

15)『繫年』의 본문에는 宋으로 쓰여 있는데, 땅은 위()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공백 화는 송()나라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여 저본에서는 宋을 宗의 오자로 보았다. 『史記正義』 「周本紀에서는 『魯連子』를 인용하여 공백 화가 위나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 자형이 비슷하기에 잘못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宗國을 가리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위나라를 가리키게 된다.

16)선왕이 제적을 폐지했다는 것은 『國語』 周語上宣王이 즉위하자 천무의 적전을 폐지하였다.’(‘宣王即位不籍千畝’)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17)선왕이 즉위한 지 39년 후에 융적이 천무에서 주나라 군사를 대패시켰다는 것은 『國語』 周語上‘(宣王) 39년에 천무에서 전투하였는데, 왕의 군대가 강씨의 융에게 크게 패하였다.’(‘三十九年戰于千畝王師敗績于姜氏之戎’)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은 장의 종결을 나타내는 부호이다.


참고문헌

저본) 清華大學出土文獻硏究與保護中心 編/李學勤 主, 『淸華大學藏戰國竹簡(貳)』, 上海: 中西書局, 2011

김석진(金錫珍), 「‘짓고 추려서 엮은’ 周王室의 역사 이야기」, 『중국고중세사연구』 Vol.0 No.46, 중국고중세사학회, 2017

陳民鎮, "略說清華簡《繫年》的“烝”", 簡帛網-武漢大學簡帛硏究中心, 2012년 03월 17일 수정, 2021년 8월 15일 접속, http://www.bsm.org.cn/show_article.php?id=1653.

'한문학 > 『繫年』 역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년(繫年)』4장  (0) 2022.01.23
『계년(繫年)』3장  (0) 2021.11.06
『계년(繫年)』2장  (0) 2021.09.12
posted by 취상
:
한문학/맹자집주 2020. 7. 5. 18:22

16(23)-1. 魯平公將出。嬖人臧倉者請曰:「他日君出,則必命有司所之。今乘輿已駕矣,有司未知所之。敢請。」公曰:「將見孟子。」曰:「何哉?君所爲輕身以先於匹夫者,以爲賢乎?禮義由賢者出。而孟子之後喪踰前喪。君無見焉!」公曰:「諾。」

노 평공이 장차 외출하려고 하였다. 총애 받는 사람인 장창이라는 사람이 청했다. “다른 날에는 임금께서 외출하시게 되면 반드시 유사에게 가는 곳을 명령하셨습니다. 지금 승여에 이미 말을 매었으나 유사가 아직 가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감히 청합니다.” 공이 말했다. “장차 맹자를 보려고 한다.” “어째서입니까? 임금께서 몸을 가볍게 하고서 필부에게 먼저 가는 것은 어질다고 여겨서입니까? 예의는 현자에게서 나옵니다. 그런데 맹자의 뒤 초상은 앞 초상보다 더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만나지 마십시오.” 공이 말했다. “그래야겠다.”

乘輿,君車也。駕,駕馬也。孟子前喪父,後喪母。踰,過也,言其厚母薄父也。諾,應辭也。
乘輿는 군주의 수레이다. 駕는 말에 멍에를 매는 것이다. 맹자는 먼저 아버지를 잃고 뒤에 어머니를 잃었다. 踰는 지나침이니, 어머니에게 후하게 하고 아버지에게 박하게 함을 말함이다. 諾은 응낙하는 말이다.

16(23)-2. 樂正子入見,曰:「君奚爲不見孟軻也?」曰:「或告寡人曰,『孟子之後喪踰前喪』,是以不往見也。」曰:「何哉君所謂踰者?前以士,後以大夫;前以三鼎,而後以五鼎與?」曰:「否。謂棺槨衣衾之美也。」曰:「非所謂踰也,貧富不同也。」

악정자가 들어와 알현하고 말했다. “임금께서는 무슨 이유로 맹가를 보지 아니하셨습니까?” “누군가가 과인에게 맹자의 뒤 초상이 앞 초상보다 더하였다고 말하기에, 이 때문에 보러 가지 않았다.” “임금께서 이른바 더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앞에는 사의 예로 하고, 뒤에는 대부의 예로 해서입니까? 앞에는 정 세 개를 쓰고 뒤에는 정 다섯 개를 써서입니까?” “아니다. 관곽과 의금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더했다는 것이 아니라 빈부의 정도가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樂正子,孟子弟子也,仕於魯。三鼎,士祭禮。五鼎,大夫祭禮。
악정자는 맹자의 제자이니, 노나라에서 벼슬하였다. 三鼎은 사가 제사하는 예이다. 五鼎은 대부가 제사하는 예이다.

16(23)-3. 樂正子見孟子,曰:「克告於君,君爲來見也。嬖人有臧倉者沮君,君是以不果來也。」曰:「行或使之,止或尼之。行止,非人所能也。吾之不遇魯侯,天也。臧氏之子焉能使予不遇哉?」

악정자가 맹자를 알현하고 말했다. “제가 임금께 고하니 임금께서 와서 보려고 하셨습니다. 총애 받는 사람 중에 장창이라는 사람이 임금을 저지하였으니, 임금께서 이 때문에 결국 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는 것은 누가 시켜서이며 멈추는 것은 누가 막아서이다. 가고 멈추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내가 노후를 만나지 못한 것은 천명이다. 장씨의 아들이 어찌 나로 하여금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尼 : 막을 닐

克,樂正子名。沮尼,皆止之之意也。
克은 악정자의 이름이다. 沮와 尼은 모두 멈춘다는 뜻이다.

言人之行,必有人使之者。其止,必有人尼之者。然其所以行所以止,則固有天命,而非此人所能使,亦非此人所能尼也。然則我之不遇,豈臧倉之所能爲哉?
‘사람이 가는 것에는 반드시 시키는 사람이 있으며 그가 멈춤에는 반드시 막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가 가게 되는 이유와 멈추게 되는 이유는 진실로 천명에 있는 것이니 이 사람이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이 사람이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지 못한 것이 어찌 장창이 할 수 있는 것이었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此章言聖賢之出處,關時運之盛衰。乃天命之所爲,非人力之可及。
이 장은 성현이 나아가고 머무르는 것이 시운의 성쇠와 관련되니 곧 천명이 하는 것이고 사람의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posted by 취상
:
한문학/맹자집주 2020. 7. 5. 17:36

15(22)-1. 滕文公問曰:「滕,小國也。竭力以事大國,則不得免焉。如之何則可?」孟子對曰:「昔者大王居邠,狄人侵之。事之以皮幣,不得免焉;事之以犬馬,不得免焉;事之以珠玉,不得免焉。乃屬其耆老而告之曰:『狄人之所欲者,吾土地也。吾聞之也:君子不以其所以養人者害人。二三子何患乎無君?我將去之。』去邠,踰梁山,邑于岐山之下居焉。邠人曰:『仁人也,不可失也。』從之者如歸市。

등 문공이 물었다. “등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힘을 다해서 큰 나라를 섬겨도 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였다. “옛날에 태왕이 빈 땅에 거주하실 때에 적인이 침입하였습니다. 모피와 비단으로 그들을 섬겨도 화를 면하지 못하였고, 개와 말로 그들을 섬겨도 화를 면하지 못했으며, 구슬과 옥으로 그들을 섬겨도 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 장로들을 모으고 말씀하기를, ‘적인이 원하는 것은 우리들의 토지이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그 사람을 기르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그대들은 어찌 임금이 없음을 근심하겠는가. 내가 장차 이곳을 떠나겠다.’라고 하시고 빈 땅을 떠나 양산을 넘어 기산의 아래에 도읍하고서 거주하셨는데, 빈 땅 사람이 말하기를, ‘인한 사람이다. 잃어버릴 수 없다.’라고 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마치 시장에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皮,謂虎、豹、麋、鹿之皮也。幣,帛也。屬,會集也。土地本生物以養人,今爭地而殺人,是以其所以養人者害人也。邑,作邑也。歸市,人衆而爭先也。
皮는 호랑이와 표범, 사슴의 가죽을 말한다. 幣는 비단이다. 屬은 모으는 것이다. 토지는 본래 물건을 생산하여 사람을 기르는 것인데, 지금 땅을 다투아 사람을 죽인다면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邑은 도읍을 만드는 것이다. 歸市는 사람이 많아서 앞을 다투는 것이다.

15(22)-2. 或曰:『世守也,非身之所能爲也。效死勿去。』
혹자는 말하기를, ‘대대로 지키는 것이어서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목숨을 바치고 떠나지 말라.’라고 합니다.

又言或謂土地乃先人所受而世守之者,非己所能專。但當致死守之,不可舍去。此國君死社稷之常法。傳所謂國滅君死之,正也,正謂此也。
또 “혹자는 ‘토지는 곧 선인이 받아 대대로 지키는 것이어서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다만 마땅히 목숨을 바쳐 지킬 것이며, 버리고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국군이 사직을 위해 죽는 떳떳한 법이니 옛 책에 이른바 ‘나라가 멸망하면 군주가 죽는 것이 올바르다.’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15(22)-3. 君請擇於斯二者。」

군주께서는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십시오.”

能如大王則避之,不能則謹守常法。蓋遷國以圖存者,權也;守正而俟死者,義也。審己量力,擇而處之可也。
능히 태왕과 같이 할 수 있으면 피하고, 할 수 없다면 떳떳한 법을 삼가 지켜야 한다. 대개 나라를 옮겨 생존을 도모하는 것은 권도이고, 올바름을 지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의이다. 자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서 선택하여 처하는 것이 옳다.
權道 : 그때그때의 형편을 따라 일을 처리하는 방도. 임기응변.

楊氏曰:「孟子之於文公,始告之以效死而已,禮之正也。至其甚恐,則以大王之事告之,非得已也。然無大王之德而去,則民或不從而遂至於亡,則又不若效死之爲愈。故又請擇於斯二者。」
양씨가 말했다. “맹자가 문공에게 처음에는 목숨을 바칠 뿐임을 말했으니 예의 올바름이다. 그 심히 두려워함에 이르러서는 태왕의 일로 말했으니 부득이해서였다. 그러나 태왕의 덕이 없으면서 따라간다면 백성이 혹시 따르지 않아서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되면 또한 목숨을 바침이 나은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또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라고 청한 것이다.”

又曰:「孟子所論,自世俗觀之,則可謂無謀矣。然理之可爲者,不過如此。舍此則必爲儀秦之爲矣。凡事求可,功求成。取必於智謀之末而不循天理之正者,非聖賢之道也。」
또 말했다. “맹자가 논한 것을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무모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치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음에 불과하다. 이것을 버린다면 반드시 장의와 소진의 행위를 할 것이다. 무릇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은 이룸을 구한다. 지혜와 모략의 지엽에서 기필함을 취하고 천리의 올바름을 따르지 않음은 성현의 도가 아니다.”
posted by 취상
:
한문학/논어집주 2020. 7. 5. 16:52

26(66). 子曰:「居上不寬,爲禮不敬,臨喪不哀,吾何以觀之哉?」

공자가 말했다. “윗자리에 거하면서 너그럽지 않고, 예를 행함에 공경하지 않으며, 상에 임함에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으로 그를 관찰하겠는가.”

居上主於愛人,故以寬爲本。爲禮以敬爲本,臨喪以哀爲本。旣無其本,則以何者而觀其所行之得失哉?
윗자리에 거할 때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주로 하기 때문에 너그러움을 근본으로 삼는다. 예를 행함에 공경함을 근본으로 삼으며, 상에 임함에 슬퍼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이미 그 근본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그 행한 바의 득실을 관찰하겠는가.
posted by 취상
:
한문학/논어집주 2020. 7. 5. 16:52

25(65). 子謂韶,「盡美矣,又盡善也。」謂武,「盡美矣,未盡善也。」

공자가 소악을 평하면서 ‘지극히 아름답고 또 지극히 좋다.’라고 하였고, 무악을 평하면서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좋지는 않다.’라 하였다.

韶 : 음악 이름 소

韶,舜樂。武,武王樂。美者,聲容之盛。善者,美之實也。
韶는 순 임금의 음악이다. 武는 무왕의 음악이다. 美는 소리와 모습이 성한 것이다. 善은 아름다움의 실제이다.

舜紹堯致治,武王伐紂救民,其功一也,故其樂皆盡美。然舜之德,性之也,又以揖遜而有天下;武王之德,反之也,又以征誅而得天下,故其實有不同者。
순 임금은 요 임금을 이어 다스림을 이루었고, 무왕은 주왕을 정벌하여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그 공이 한 가지이다. 그러므로 그 음악이 모두 지극히 아름답다. 그러나 순의 덕은 본성대로 한 것이고 또 읍하고 사양함으로써 천하를 소유하였고, 무왕의 덕은 잃은 본성을 되찾은 것이고 또 정벌하고 주살함으로써 천하를 얻은 것이므로 그 실제에 같지 않음이 있다.

程子曰:「成湯放桀,惟有慚德,武王亦然,故未盡善。堯、舜、湯、武,其揆一也。征伐非其所欲,所遇之時然爾。」
정자가 말했다. “성탕이 걸왕을 유폐함에 부끄러워하는 덕이 있었는데 무왕 또한 그러하였으므로 지극히 좋지는 않다. 요 임금, 순 임금, 탕왕, 무왕의 법도는 하나이니, 정벌은 하고자 해서 한 것이 아니라 만난 때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posted by 취상
: